오늘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무려 1896년의 이야기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120년 정도 격차가 있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별다른 의미 없는 그냥 먼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정치적인 의미 따위 1도 없고, 취업을 위한 ‘인문학적 교양’에 보탬이 되는 그런 이야기.
“정부 영역이 인민에 대해 부정을 자행하고 있는 현 상태는 넓게 보면 인민 영역에서 저항이 총체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타인이 그러한 처우를 받아들이고 저항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을 억압하기를 즐기고 그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약자를 억압하려고 애쓴다. 대중들의 이러한 노예적 심성은 그들이 국가의 시민으로써 가지는 생득적 권리들이 무시당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지식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들은 권위의 영역에서 자행되는 그러한 무법을 더 이상 관용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발언은 1896년 12월 5일, <독립신문>의 영자판인 에 실린 사설의 일부를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사설에 따르면 발언자는 “한 한국 귀족 청년(a young Korean noble man)”으로, 이보다 이틀 앞서 발간된 12월 3일자 사설에 배재학당에서의 연설회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배재학당 학생 가운데 한 명으로 추측된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영어, 천문, 지리, 생리, 수학 등 최신학문을 외국인 선교사와 당대 최고 개화지식인들이 직접 가르쳤다. 지금의 특목고나 자립형사립고와 비슷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텐데, 역시나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배출됐다. 저명한 동문만 꼽아도 이승만 전 대통령, 국문학자 주시경, 시인 김소월, 독립운동가 지청천, 여운영 등 수두룩하다.
어찌 보면 엘리트 양성소 같은 인상을 버릴 수 없지만, 배재학당은 단지 그런 곳은 아니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설립목적을 “통역관이나 학교의 일꾼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교육”은 자유로운 개인을 양성하겠다는 수준을 넘어, 그들을 사회에 “내보냄”으로써 한국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큰 인물이 되려는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할 줄 알아야 된다(欲爲大者 當爲人役)”는 배재학당의 학당훈(學堂訓)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목적 아래 배재학당의 학생들은 과외 활동으로 연설회와 토론회를 개최했다. <협성회>는 이에 따라 결성된 일종의 학생회로, “자유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창구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후 일반인도 회원으로 받아들이면서 결성 1년 만에 회원 수 200명을 넘겼고, 지방 조직이 결성되는 등 본격적인 사회운동단체로 변모해간다.
앞서 언급한 “한 한국 귀족 청년”의 발언은 이러한 맥락 위에 행해진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1) 정부는 인민에 대해 부정과 무법을 자행하고 있다. (2) 정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저항하지 않는 것은 노예적 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4) 노예적 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지는 주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를 당시에 유행하던 말로 바꿔 요약하면 아마 이런 식일 것이다. “지금의 우리 정부는 ‘야만’과 ‘무법’을 자행하고 있다. 이 정부가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가 ‘미개’하기 때문이다. 이 억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우리가 ‘개화’해야 한다. 즉,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권리를 가진 주체임을 자각하고 정부의 ‘야만’과 ‘무법’에 ‘저항’해야 한다.” 그에게 ‘미개’는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깨닫지 못한 채 굴종하며 저항하지 않는 것이었으리라.
1896년 12월 3일자 사설은 그의 발언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렇게 덧붙였다.
“회의주의자들은 한국의 미래에 대해 그들이 바라는 바를 이야기 할 것이나,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이 나라가 재생할 것이라는 희망, 커다란 희망을 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장밋빛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스펙터클함을 통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은 우리가 최근에야 자각하게 된 여러 사건들에 기초하고 있다. 여러 학교의 학생들은 한국의 다른 어떤 계층의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준다.”
이후 희망이 현실로 바뀌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1898년 10월 29일에 열린 <관민공동회>는 그 정점에 있는 사건이었다. 서울 종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의정부 참정을 비롯해 중추원 의장,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 정부 관료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황제에게 건의하는 <헌의 6조>를 채택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그들 가운데 제일 먼저 단상에 오른 것은 관료도 학생도 아닌, 백정출신의 박성춘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이었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지금 나라에 이롭고 백성이 평안할 길은 관민이 합심해야만 이룩될 수 있소. […] 존귀하신 관민 여러분, 합심하여 우리 황제폐하의 성덕에 보답하고 나라를 오래 부강하게 합시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898년 11월 1일 종로에는 다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헌의 6조>에 대한 고종의 재가를 기다렸다. 이에 고종은 “헌의 6조는 마땅히 실시할 것이며 그 밖에도 몇 조항을 첨가해 조칙으로 반포할 것이니 해산하여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11월 2일,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면서 한국 최초의 의회 설립이 눈앞으로 다가온 듯했다. 그러나 선거일인 11월 5일 새벽 상황은 급반전하게 된다. 갑자기 들이닥친 순검들에 의해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된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종로와 남대문으로 나왔다. 불과 며칠 전 “황제폐하의 성덕에 보답하고 나라를 오래 부강하게 하자”며 ‘국민통합’을 외쳤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건의 경위를 해명’하고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상인들도 이에 호응하며 시장을 물렸다. 11월 10일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체포된 11명 전원을 석방했다. 그러나 황제는 <헌의 6조>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민중의 요구가 계속되자 근왕파 대신들은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들을 시켜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1896년 12월 “한 한국 귀족 청년”는 불과 2년 뒤인 1898년 11월의 상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이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정부는 얼마나 ‘야만’과 ‘무법’에서 벗어났는가? 우리는 얼마나 ‘미개’를 극복하였는가? “자유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얼마나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희망이 보이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건 데, 2015년 4월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별 의미 없는 옛날이야기다. 정치적인 의미 따위 1도 없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