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든지 말든지.’

손님이건 사장님이건 간에 이런 생각으로 대했고,

지루함에 대한 격렬한 감정이 거짓말같이 잦아들었다

“평소대로라면 난 돌아서서 다른 길로 걸어갔을 거야. 하지만 오늘은 여기 서 있을 거야. 떠나지 않고.” - Travis

봄과 여름 사이, 길게만 느껴지던 하루가 채 끝나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갑자기 모든 게 지루하게 느껴졌다. 매일같이 지나던 길,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들. 그 지루함이 소름 끼치게 싫어서 무작정 버스에서 내렸다. 오른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골목을 비집고 내리쬐는 햇살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기껏 일탈이랍시고 저지른 짓이 집 근처에서 미아가 되는 거였다니! 버스가 사라진 방향을 쫓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지루할 틈 없는 하루였다. 점심도 거르고 강의를 두 개나 들었고, 뒤늦게나마 리포트 하나를 마무리해 제출했으며, 성질에 맞지 않는 조모임을 견디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집이라고는 했지만 작은 부엌과 화장실이 달린 반 지하 단칸방이었고, 그나마도 친구 자취방에 얹혀 사는 신세였다. 그런 스물한 살 청춘에게 고민이 없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뿐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애써 무시하며 견뎌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낯익은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면서, 머릿속으로는 이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소름 끼치도록 싫어진 이유를 찾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것보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때, 눈앞에 편의점이 나타났다.

‘초라한 일탈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개점 이래 한 번도 꺼진 적 없는 편의점 간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도 밤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곳이다. 자취방과 편의점은 걸어서 십 분 거리. 서두르면 밥 먹고 씻고 삼십 분 정도는 쉴 수 있을 터였다.

바삐 걸음을 옮기려는데, 현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어디선가 Travis의 노래가 흘러들어왔다. 편의점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레코드 가게였다. 뜻 모를 최신 가요로 소음 공해만 양산하던 곳이다. 들어간 본 적?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일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가 간밤에 모던 록의 신과 접신이라도 한 걸까?

조심스레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자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아가씨는 CD 몇 장을 손에 들고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 흔한 “어서 오세요”조차 없었다. 인기척이라도 할까 했지만, 말하자면, 나 역시 딱히 뭘 사러 들어온 ‘손님’은 아닌 셈이니까. 이 노래만 듣고 나가자,는 심정으로 괜히 CD만 뒤적거렸다.

‘슬슬 막바지로 가는구먼 이제 U16 Girls인가?! 이제 그만 가야지….’ 알바생은 역시나 쳐다보는 척도 하지 않는다. ‘알바 참 편하게 한다.’ 피식 웃으며 반쯤 열린 문으로 나가려던 찰나, The Verve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열던 문을 놓고 카운터 앞에 우두커니 섰다.

“가방에 갇혀 물에 빠져 죽기만을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이제 나는 무너지고 있어요.”

- The Verve

그녀가 나를 쳐다봤지만, 놀란 기색은 없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내 사랑.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다면, 기꺼이 인정하겠어요(Maybe, maybe, maybe, maybe, maybe dear. I guess I might have done something wrong, Honey I’d be glad to admit it.).” - Janis Joplin

아무것도 팔고 싶어 하지 않는 알바생과 아무것도 살 생각이 없는 손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삼십 분 동안 음악만 들었다. 나 역시 아무런 인사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급하게 밥을 우겨 넣고, 채 마르지 않은 머리로 편의점 카운터 뒤에 섰다.

늦은 저녁부터 심야까지 손님들은 취한 사람 아니면 취하고 싶은 사람뿐인 듯했다. 다짜고짜 만원짜리를 던지면서 “담배!”라고 소리치는 아저씨나, 바코드를 읽는 건지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 동안 고민하는 아가씨를 처리하고, 새벽에 들어온 물건을 정리하고 나면, 전에 말한 ‘고독한 철학자의 시간’이 시작된다. 사장님이 CCTV를 확인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졸지도 못하고 빈 카운터를 멍하니 지키고 앉아있는 시간.

어느새 먼동이 트고, 아침 근무를 마친 미화원 아저씨가 샌드위치에 청하 한 병을 뚝딱 비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사장님과 바톤 터치를 한다. “수고했다, 별일 없었냐.” 그 정도에서 끝나면 좋을 아침 인사는, 월급날이면 으례 “그래도 우리 편의점이 편한 거다. 밤에 일도 없는데 이 정도면 잘 주는 거다”로 이어진다. 내가 받는 시급이 최저시급에 조금 못 미치며, 그나마도 주간 근무에 비해 많이 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얇디얇은 월급봉투 위에 곧 폐기될 삼각 김밥 몇 개 얹어주는 마음에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꾸벅 인사하고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이걸로 또 한 달을 버텨야 하는구나.’ 무거운 마음으로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으면서 혹여 십 원 한 푼이라도 빠지진 않았나, 꼼꼼히 세어본다. 배울 만큼 배웠고, 법이든 기관이든 하다못해 인터넷에라도 어떻게 해보자면 못할 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나도 참 힘들다. 알바생들 월급 주고, 기본 유지비 다 정산하고 나면 손에 쥐는 건 얼마 없어”라는 사장님의 식상한 레퍼토리가, 설령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걸려서 차마 모진 마음은 먹을 수 없다.

“그저 완벽한 하루. 너로 인해 나는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 어떤 좋은 사람(Just a perfect day. You made me forget myself. I thought I was someone else. Someone good.).” - Lou Reed

퇴근길에 지나친 레코드 가게는 아직 철문이 굳게 내려져 있었다. ‘실례지만, 우리 가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라고 항변하는 것처럼 철문 사이로 비친 쇼윈도에는 아이돌 가수의 포스터만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여전히 지루함의 원인을 찾았고 끝내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법은 하나 발견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손님이건 사장님이건 간에 이런 생각으로 대했고, 지루함에 대한 격렬한 감정이 거짓말같이 잦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된 건 둘째치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