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화를 속으로만 삭인다

누군가는 화를 무조건 발산한다

다른 현명한 누군가는 화를 요리조리 요리한다

가끔 화가 나서 밤에 잠을 못 이룰 때가 있다. 다짜고짜 이 문장을 읽은 독자라면 글쓴이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사실이다. 겉으로는 온화한 척하지만 속으론 분노가 부글부글 끓는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온몸을 비집고 지하철 안을 파고드는 아주머니. 계단에서 담뱃불 붙이는 아저씨. 어깨를 맞대고 걸으면서 지나갈 틈을 주지 않는 학생들. 그뿐이 아니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 아무리 기다려 봐도 차들은 멈춰주지 않는다. 혹시나 하여 살짝 발길을 내디뎌 봤더니 달려오던 차는 순간적으로 액셀을 밟으며 재빨리 클랙슨을 울렸다. 나열하자면 한참 더 남았지만, 글을 쓰면서도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자.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살고 있지만 하루 종일 열불 터지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터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 터지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땐 응당 그렇듯 현인들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화 안 내기로 유명한 현인 하면 베트남 승려 틱낫한(석일행, Thich Nhat Hanh)이 유명하니 그의 말을 떠올려 본다. “화는 날감자와 같은 것이다. 감자를 날것 그대로 먹을 수는 없다. 감자를 먹기 위해서는 냄비에 넣고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화도 마찬가지다. 당장 화가 났다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말고 일단 숨을 고르고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틱낫한 스님의 메시지를 따라 3초 동안 꾹 참기, 향초 켜기, 명상하기, 생각 버리기 연습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화가 났다. 그저 3초 동안 화가 더 치밀든가, 향초 맡으며 화를 내는 정도일 뿐. 감자는 익혀 먹어야겠지만 분노는 익혀 먹으면 원망만 더해지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화를 참으면 큰 병이 되니 화를 분출하라기에 몇 번 해봤지만 ‘분노조절장애’ 취급만 받았다.

이런 내게 “좋은 물건이 있다”며 은밀하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실명을 거론할 수는 없으니 그를 이 모씨의 아들 정섭 군 정도로 명명하자. (왠지 「대학내일」 기자일 것도 같지만 지나친 생각이다.) 그는 ‘낙관적 비관주의’와 ‘개복치 같은 삶’을 추구하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좋은 물건은 우디 앨런과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이었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그가 추천한 것들이었기에, 속는 셈 치고 살펴봤다. 우디 앨런(Woody Allen)의 영화 <환상의 그대(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는 셰익스피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다. 원래 사람들은 이따위고, 정부는 그따위고, 세상은 저따위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 보였다. 감자를 요리하듯 분노를 익혀 먹으라는 틱낫한의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인생이니 ‘분노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분노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것은 진짜로 웃으며 욕을 하라는 게 아니라, 화를 그와 반대되는 행동으로 표출하라는 의미였다. 인생이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는데 분노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분노의 감자’를 잘 익혀서 웃으며 먹여줄 수는 있다. ‘분노의 감자’를 요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에코는 시니컬하게 요리한다. 집에서 책을 집필하는 그에게 가족들은 절대적인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너가 책을 쓰든 말든 우리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는 태도다. 일견 화를 낼 수도 있는 이 태도에 대응해 움베르토 에코는 책 서문에 썼다. “우리 아이들도 내가 일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애정과 에너지와 자신감을 줌으로써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의 일에 대해서 보여준 아이들의 철저하고 초연한 무관심에 감사한다.” 냉소가 가득하지만 ‘뭐 어쩌겠어. 나도 너 게임할 때 관심 없는 데 뭐.’ 이 정도의 자세며 게다가 뜬금없이 공손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도 ‘분노의 감자’를 친절하고 공손하게 요리해 먹이기로 했다. 온몸을 들이미는 아주머니에겐 웃는 얼굴로 “어이쿠. 많이 급하신가 봐요? 그러다 다치십니다. 비켜드릴 테니 먼저 가세요.” 계단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아저씨에겐 최대한 공손하게 “어르신. 여기서 담배를 피우시면 안 됩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 친절한 미소로 답해줬다. 처음엔 기껏해야 ‘정신승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효과는 강력했다. 친절한 미소와 공손한 말을 접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노려볼 때는 ‘뭐야. 왜 쳐다보고 XX이야’라는 표정으로 반응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푹 숙이거나 머쓱한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야. 이 XX야!” 소리 지르는 것보다 통쾌했다. 제대로 감자를 먹인 셈이다.

나를 분노케 하는 모든 일에 이런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분노 자체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안 들수록, 화가 날수록, 더 친절하고 공손하게 웃는 얼굴로 반응하면서 인간관계에서 많은 부분이 편안해졌고, 화낼 일도 줄어들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와 함께 친절하고 온화한 태도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분노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지만,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팔 할이 분노였던 셈이다.

분노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분노를 억누르라는 쪽도, 가슴을 찢으며 분노를 표출하라는 쪽도 정답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제는 ‘분노의 감자’를 잘 요리하는 것에 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노의 감자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생에 작은 의미가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