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취업 경쟁력을 위해 영어회화를 공부할 때, 다른 누군가 세계 여행으로 견문을 넓힐 때 구슬치기협회원들은 묵묵히 구슬을 친다 그리고 말한다. “오늘은 모두가 무척 충실하고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다.”

‘성실’은 지고지순의 미덕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열심히 해야 함은 분명하다. 우리네 부모님들도 항상 “뭐든 좋으니 열심히만 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성실의 대명사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말을 좀 더 고상하게 표현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정직과 성실만큼 그대를 돕는 것은 없다.”

성실하게 사는 것은 이 시대의 멘토들도 강조하는 부분이다. 방황하는 청춘을 향해 멘토들은 무엇이든 자신만의 꿈을 찾아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것도 있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1만 시간이라면, 하루 10시간씩 무려 1000일. 그만큼 노력없이 전문가가 된다는 것도 이상하고, 반대로 그만큼이나 노력하고 전문가가 못 되는 것도 이상하니 결국 아무것도 아닌 법칙이지 싶다. 아무튼, 어려서부터 의지박약에 성실결핍으로 곤란을 겪어온 나같은 사람에겐 성실할 수 있다는 자체가 대단해 보이긴 한다.

수많은 선현과 멘토의 조언을 받들어 나도 성실하게 살아보기로 했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성실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나처럼 의지박약과 성실결핍에 시달리는 친구들과 단체를 하나 결성했으니 이름 하여 <대한구슬치기협회>. 영어로는 마블 슈팅(Marbles Shooting), 동그란 구슬을 던져 맞추는 바로 그 구슬치기다.

구슬 치는 것도, 구슬 치러 대문 밖에 나서는 것도, 심지어 구슬 사는 것도 귀찮아하는 우리지만 몹쓸 병마와 싸우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서로 다독이며 단체를 만들었다. 강령도 거창하게 정했다. “우리는 구슬치기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찌나 멋있는지 주변인들은 키득거리는 명랑한 웃음으로 찬사를 보냈다. <대한구슬치기협회>의 당면 목표는 <세계구슬치기대회(British and World Marbles Championship)>에 국가대표를 보내는 것. 농담으로 착각할 이들을 위해 굳이 설명하자면 <세계구슬치기대회>는 진짜 있는 대회다. 1932년 이후 매년 성금요일(Good Friday)에 영국 웨스트 석세스(West Sussex) 티모시 그린(Tinsley Green)에서 열리고 있다. 당연히 <세계구슬치기협회>도 이미 존재한다.

절차에 따라 <대한구슬치기협회>를 정식 협회로 등록한 다음엔 전국 지부를 개설할 예정이다. 이후 <세계구슬치기협회>에도 가입하고 <세계구슬치기대회> 참가를 위한 국가대표선발전도 진행한다. 전국의 구슬치기 강자들이 모이는 전국대회를 연 뒤, 순수 실력으로만 대표를 선발한다. 유명 대학을 나왔든, 대표와 친하든 구슬 외적 요소는 배격한다. 귀화 선수도 참여 가능하다. 약간 우려스러운 것은 파벌 문제다. 홍제동파, 합정동파 등 선수들끼리 뭉쳐서 자기들 구슬치기 스타일을 선전하며 밀어주고 끌어주면 곤란해질 텐데. 이건 나중에 고민하기로 한다.

성실하게 협회를 구성하는 게 우선이다. 먼저 협회 규정과 게임 규칙, 공인 구슬 등을 정해야 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한 구슬치기 자격증 혹은 구슬치기 지도자 자격증도 만든다. 이 과정을 위해 구슬치기 선수 및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도 개설해야 할 판이다. 이 부분은 정부가 최근 발표한 ‘신직업 육성계획’에도 부합한다. ‘구슬치기 전문가’라는 전문 직업인이 생기는 건데, 구슬이란 뜻밖의 아이템을 활용했으며 망해봤자 구슬 몇 개를 날릴 뿐이니 리스크도 적다. 창조적이고 경제적이다. 다시 말해 ‘창조경제’적이다(깨알 아첨: 역시 현 정부는 위대하십니다).

갑자기 아름다운 장면이 떠오른다. 이 땅의 소년 소녀들이 국가대표 구슬치기 선수를 목표로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장면이….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매번 무시당하는 한 소녀가 말한다 “다른 건 모르지만 나 구슬치기만은 잘할 자신이 있어. 내가 사랑하는 건 구슬치기뿐이야. 나는 구슬치기 세계 챔피언이 될 거라고!”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남몰래 손가락을 튕기며 노력한 예쁜 소녀. 각고의 노력 끝에 손가락 긴 서양인에게도 어렵다는 트리플 브레이크 슛을 완성하고 만다. 구슬치기계의 총아로 떠오른 그녀를 언론은 ‘흙판의 여왕’으로 추켜올린다. 애리조나의 황량한 흙판부터 후쿠시마의 방사능 흙판까지 전 세계를 누비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웨스트 석세스에서 열린 세계구슬치기대회에 참가하지만 편파 판정 끝에 은메달에 그친다. 분노한 한국인들은 웨스트 석세스에 대한 강한 비난(West Sucks! 라는 비속어가 예상됨)을 쏟아내고, 페이스북 ‘진정한 구슬치기 영웅은 당신입니다’라는 게시글엔 수많은 ‘좋아요’가 달린다.

지나치게 개인 영웅화로 치달았다면 민족화합은 어떨까? 남북한 정부가 양국간 구슬치기 정기전을 개최한다고 치자. 처음엔 미제의 앞잡이니 빨갱이니 갈등도 있겠지만 튕기는 구슬이 쌓일수록 선수 끼리 우정도 깊어진다. 이념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구슬 하나에 인생을 건 뜨거운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남북한 정부는 늘 그렇듯 정치적인 이유로 정기전을 폐지하기로 한다. NLL? 북핵? 이유는 다양하다. 마지막일지 모르는 경기, 북한 선수들은 붉은 구슬, 남한 선수들은 푸른 구슬을 들고 나와 하얀 경기장 중앙으로 구슬을 모은다. 붉고 푸른 구슬들이 회오리처럼 모이더니 마침내 태극 무늬를 이룬다. 감동의 물결이 방송을 타고 한반도를 휩쓰는데… 감정이 격해져 더는 못 쓰겠다.

여태껏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밥 잘 먹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는 비난이 떠오를 법하다.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읽었다. <대한구슬치기협회>는 힘써 쓸데없는 짓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쓸데없으면 없을수록 좋다. 넋 놓고 뛰노는 새끼 사자들을 보고도 “(동물의 왕국 내레이션으로) 이 어린 사자들은 그냥 노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생존에 필요한 사냥 기술을 익히는 거죠”라며 쓸모를 강조하는 실용 지상주의 세상에 대항해 <대한구슬치기협

회>는 성실한 무(無)쓸모를 주장한다.

협회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만화가 우스타 쿄스케가 명작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에서 말했다. “오늘은 모두가 무척 충실하고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다.” 상상해보라, 쓸데없는 일을 땀 흘려 성실하게 하고 났을 때의 뿌듯함을! 쓸모 있는 일을 억지로 할 때는 느껴보지 못한 환희를! <대한구슬치기협회>의 문은 성실하게 구슬치기에 임할 청년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성실이야말로 지고지순의 미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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