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인종차별, 극단적 여성 비하, 극단적 먹방

이들의 극단에는 방향이 없다

극단 자체의 쾌락이 순수한 이유다

손질한 메추라기 위에 코니쉬 헨, 그 위에 닭고기, 그 위에 칠면조, 그리고 베이컨, 베이컨 , 베이컨. 이걸 갖은 양념과 함께 새끼 돼지 안에 넣고 오븐에 구워낸다. 다시 한 번 베이컨, 베이컨, 베이컨. 7만 9046㎉짜리 통 바비큐 완성이다. 보는 것만으로 속이 느글거리는 ‘고깃덩어리’를 독한 술과 함께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내장 파괴’와 ‘먹방’의 극단에 서 있지만, 캐나다 출신의 ‘육식남’들이 만든 <에픽 밀 타임(Epic Meal Time)>은 유튜브에서 매회 수백만 뷰를 자랑하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막장 프로그램이라면 <잭애스(Jackass)>를 빼놓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미국의 바보 멍청이들이 바보 멍청이 짓을 하는 시리즈다. 쇼핑 카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의 가파른 언덕을 질주하거나, 맨몸으로 성난 황소와 씨름하는 것 쯤은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한다. 한밤중에 부모님 방에 들어가 폭죽을 터뜨리거나, 판매점에 전시된 변기에 용변을 보고 도망치기도 한다. 분명 멍청이들이다. 그런데 지난해 개봉한 신작<잭애스 프레젠트: 배드 그랜파(Jackass Presents: Bad Grandpa)>는 미국에서 개봉 3일 만에 3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미 <잭애스> 1편으로 7900만달러, 2편으로 8400만 달러, 3D 판으로 무려 1억 71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전례도 있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바보 멍청이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바보 멍청이 라고 욕하면서도 기꺼이 시간과 돈을 들여 그들의 바보 멍청이 같은 짓을 찾아본다. 아니, 바보 멍청이이라고 욕하고 싶어서 찾아본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극단적인 내용 을 담고 있지만, 더 이상 특별 한 취향을 가진 일부 마니아만 을 위한 문화라고 볼 수 없다. 적어도 인터넷 상에서는 이런 극단의 문화가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

나 역시 깔깔 웃으며 보지만, 7만 9046㎉짜리 통 바비큐를 만드는 짓이나 한밤중에 부모님 방에 들어가 폭죽을 터뜨리는 짓은 아무래도 긍정하기 어렵다. 어딘가 나쁜 짓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바보 멍청이들!” 깔깔 웃어놓고는 엔딩 크레딧과 함께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낀다. 지구상의 15억 명이 굶주리고, 5세 미만 영아 사망률이 평균 1000명당 52명에 이른다는데, 음식과 목숨으로 장난치는 꼴을 보면서 웃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 전환 삼아 본 것인데 외려 기분이 나빠진다.

그 자체에서 어떤 재미를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욕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일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또 한 번씩 찾아보게 되는 건 왜일까? 나의 억눌린 욕망을 우회적으로 분출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바보 멍청이’이라고 욕하면서 ‘나는 정상이야’라는 심리적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찌 되었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재미를 느낀다.

문득 다른 곳으로 생각이 미쳤다. 대리만족이든 카타르시스든 보고 즐기는 쪽이야 재미를 느낀다 치더라도 직접 하는 쪽은 어떨까? 그들은 왜 바보 멍청이 같은 짓을 하는 걸까? 적어도 화면상으로 <에픽 밀 타임>과 <잭애스> 출연진들은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표정은 호기심 가득한 장난꾸러기의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바보짓은 라면에 초콜릿을 넣어본다거나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는 장난의 극단적 버전에 불과했다.

그 정도의 장난이라면 나 역시 해본 적이 있다. 아니, 많다. 그보다 심한 장난도 쳐봤다.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전방 낙법으로 들어가 “두두두두두, 나는 람보다. 하하하.” 혹은 “아아아~ 나는 타잔이다. 하하하.”를 외치는 일종의 벌칙게임 같은 것도 했었다. 타잔은 지하철 승객 한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며 “따라와. 치타!”라고 말해야 했다. 람보든 타잔이든 핵심은 지하철 출입문이 닫히기 전에 탈출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항상 타잔이 람보보다 절박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민폐였다. 요즘이라면 ‘지하철 막장 중학생’같은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뭇 매를 맞았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이런 바보짓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눈물 쏙 빠지게 혼나더라도 도망칠 때는 언제나 깔깔 웃고 있었다.

위험부담마저도 스릴로 간주했다. 장난에 익숙해지면 더 큰 희열, 더 큰 스릴을 위해 쉽게 극단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관찰자보다 직접 장난을 실행에 옮기는 쪽의 쾌감이 더 컸다.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철이 들어서 일수도, 단순히 질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어느정도 한계점를 넘어가게 되면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라는 일종의 심리적 브레이크가 작동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한계를 넘어 극단을 실행에 옮기는 친구들이 있었다. 일단 한계를 넘은 친구들은 자타 공인 ‘이 구역 미친놈’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들에게 ‘미친놈’은 용자, 다시 말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트로피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지 못한 친구들 에게 만족감을 주는 듯했다. 그렇게 작은 부추김, 사소한 영웅 심리에 극단에 선 친구들은 이제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끊임없이 극단의 문화를 생산해냈다. 일반적인 장난의 한계점을 한참 벗어난 일이라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이 무언가 나쁜 짓, 심지어 범죄의 느낌을 주더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극단을 개척하면서 영웅담을 쌓아가기시작한 것이다.

그들을 부추기고 지켜보던 친구들은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를 몸소 확인해준 것에 감사하고 ‘그나마 나는 정상이야’라며 심리적 만족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는 쪽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욕을 먹는 쪽은 쾌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극단의 문화는 무럭무럭 커가는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이합집산 할 수 있는 인터넷 세계에서는 친구집단보다 훨씬 더 쉽게 극단의 문화가 형성되고 또 성장한다. ‘각 구역의 미친놈’들이 모인 커뮤니티의 경우, 웬만해서는 ‘용자’가 될 수 없기에 경쟁적으로 극단을 추구하기 때 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욕하고 바깥에서 자신들을 욕하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더 심한 ‘극단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에픽 밀 타임>일 수도 있고 <잭애스>일 수도 있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일 수도 있고 극렬한 민족주의일 수도 있다. ‘그들’의 극단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다. 그들은 사실 극단 자체를 추구한다. 결국 ‘그들’의 극단에 또 다른 극단으로 반응하는 쪽 역시 ‘극단의 문화’를 지탱하는 적대적 동반자일 뿐이다. 오늘도 ‘극단의 문화’는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