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실력 차이가 커지는 손오공과 크리링.

손오공이 우주 최강 전사인 반면, 크리링은 지구 최강도 될까 말까다.

그럼에도 둘의 우정은 영원히 이어진다.

손오공과 크리링은 우리에게 진짜 우정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여기 두 소년이 있다. 검은삐죽머리 소년은 양할아버지의 손에 길러진 천둥벌거숭이다. 한 살 더 많은 민머리소년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형(師兄)들에게서 도망친 다림사 동자승이다. 한쪽은 ‘강해지고 싶다’는 순수하고 직선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권법을 배워서여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다’는 민망하지만 솔직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닮은 듯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이처럼 각기 다른 이유로 같은 스승을 모시게 된다. 그리고 힘겨운 수련을 함께하면서 이들은 라이벌이자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평생 아웅다웅대며 함께 성장해나갈 것이라 생각했건만 운명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둘의 실력 차이가 점점 벌어지게 된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두 소년의 우정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의 만화 『드래곤볼』의 손오공과 크리링을 염두에 두고하는 말이다. 『드래곤볼』을읽어본 적 없더라도 다들 검은 삐죽머리의 손오공이 주인공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드래곤볼』은 간단히 요약하면, 손오공이 ‘초 사이어인’이라는 금발 전사로 변신해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이야기다. 그렇다. 손오공은 본래 지구인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닌, 사이어 별에서 온 외계인이다. 손오공은 우주급 악당프리더의 손에 전투 노예로 전락하고 만 사이어인의일원으로, (갓난아기이긴 했지만)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파견된 ‘지구 침공 외계인’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으로 지구인의 손에 지구인으로 키워진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는 용사가 되어 악당을 물리친다.

‘맹목적으로 지구를 지키는 외계인’이라는 점에서 『드래곤볼』은 <슈퍼맨>과 비슷하다. 그리고 슈퍼맨 클라크에게 지구를 지키는 것은 연인 로이스레인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슈퍼맨에게 레인이 있는 것처럼 손오공에게는절친 크리링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지만, 양쪽 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과 우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러나 슈퍼맨과 로이스 레인의 관계가 한 쪽이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구해주고 지켜주는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것에 반해, 손오공과 크리링은 동료이자 라이벌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차이가 있다.

크리링이 처음부터 손오공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건 아니다. 작자인 토리야마는 크리링을 일회성조연급 캐릭터로 기획했다고 고백했다. 밤톨같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밤을 뜻하는 일본어 ‘쿠리(栗)’에서발음을 따서 ‘쿠리링’이 되었다는데, 한국말로는 ‘밤톨이’ 정도가 되겠다. 밤톨이라니! 그야말로 일회성캐릭터다운 이름이지 않은가. 사실 크리링은 손오공을 돋보이게 하는 극적 장치에 불과했다. 비슷한 연령, 비슷한 체구에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수련했지만, 결국 손오공이 조금 더 나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비교 대상이었다. 거북선인의 수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두 소년은 ‘천하제일 무술대회’에 참가하는데, 여기서 크리링은 자기를 괴롭혔던 선배들을 간단히때려눕힌다. 이만큼 강해진 크리링은 2차 본선에서손오공과 대결하게 되는데, 크리링이 집요하게 손오공의 약점을 공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점을극복한 손오공이 결국 승리하게 된다.

크리링에게 이김으로써 손오공은 자신을 한 사람의어엿한 무술가로 여기게 된다. 철학자 헤겔(Hegel)은‘인정 투쟁’을 설명하면서 인정에 대한 욕구는 자기 가 인정하는 상대로부터 인정받을 때 비로소 충족될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 경우 크리링에게 이김으로써 손오공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충족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자신의 역할을 다한 크리링은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끝난 뒤 난데없이 나타난 피콜로 대마왕의 부하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드래곤볼>에서 퇴장한다. 피콜로 대마왕을 쓰러뜨린 뒤신룡에게 부탁한 덕에 다시 부활하게 되지만 이후 크리링은 더 이상 손오공의 라이벌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손오공은 이후 온갖 최강 악당들을 물리치며 점점 강해지는데, 지구에 해가 되는 존재는 무엇이든 손오공의 분노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활한 크리링 역시 그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 지구를 지키는 싸움에서 순수 지구인으로 한몫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최강 지구인, 속칭 ‘인간 본좌’로 때로는 손오공의 목숨을 구한 적도있었다. 하지만 크리링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죽는 데’ 있었다. 크리링의 죽음은 언제나 손오공을 분노케 했고, 그것은 항상 손오공을 더 강하게 만드는계기가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살신성인이라할 수 있겠지만, 더 이상 손오공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에 나온 극장판 <드래곤볼: 신과신>에 이르러서 그 차이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손오공이 우주 최강의 신(神)급 전투력을 갖게 되었는데, 손오공이 전투 중에까딱 힘 조절을 잘못해서, 혹은 괴물과 싸우는 꿈을꾸며 잠꼬대를 하거나 행여 재채기를 심하게 해서지구가 박살 나진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손오공과 크리링의 관계는 더 이상 우정의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크리링은 갈수록 슈퍼히어로를 지원하는 사이드킥(예를 들어, 베트맨과로빈에서 로빈)에서 사이어인의 우등함을 몸소 비교해 보여주는 열등한 지구인으로, 나아가 스토리를설명하는 방관자로 이야기의 중심에서 멀어져갔다. 솔직히 말해서, 프리더 이후에는 손오공에게 크리링은 라이벌은커녕 대련 상대로서도 의미를 갖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크리링은 손오공에게 더 이상 인정투쟁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가 인정하는 상대로부터 인정받을 때 비로소 인정에 대한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는 말은, 반대로 비교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존재에게 인정받아봐야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드래곤볼 시리즈의 뒷이야기라 할 수 있는<드래곤볼 GT>는 손오공과 크리링의 대련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 대단원의 마지막이 그 둘의 대련이라는 점은 크리링이 여전히 손오공의 라이벌이자 절친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소년만화의 3대 요소인 노력, 우정, 승리 중에 역시우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손오공은 어째서 크리링을 여전히 함께 대련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것일까? 크리링은어째서 여전히 손오공의 절친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것일까? 이제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는 둘 사이에어떻게 우정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 둘의 우정을 납득할 수 있는 것일까? 조금만 입장이 달라져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때의 동료를 하나둘 잃어가는 우리에게 손오공과 크리링의 우정은 얼마나 특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