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민폐는 용서치 않겠다는 현대의 엄격함이

우리 곁의, 우리 안의 조르바를 멸종시키고 있다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친구가 내게 말을 했죠. 기분은 알겠지만 시끄럽다고. 음악좀 줄일 순 없느냐고. …슬픈 노래 부르면서 혼자서 달리는 자정의 공원. 그 여름날 밤 가로등불빛 아래 잊을 수도 없는 춤을춰.” 한 밤중 공원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달리다니 미쳤다는소리를 듣기에 딱 좋은 행동이다. 술자리에서 ‘야, 내가 얼마 전에 미친 X 본 이야기 해줄까?’라며 안줏거리로 삼을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건 ‘이웃에게 방해가되지 않는 선에서’ 나름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반응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그 ‘선’이라는게 생각보다 폭이 좁은 게 분명하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알렉시스 조르바’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신이 나면 춤을 추고 내킬 때만악기를 연주하는, 말 그대로 호탕한 자연인이다. 내키는 대로 춤추고 노래하는 조르바가 요즘 태어났다면 경찰서를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신세겠지만, 소설속 ‘범생’ 주인공은 그런 조르바야 말로 생명력과 창조력을 가진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조르바까지는 아니지만,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 가사 정도는 되는 사람들은몇 명인가 알고 있다. 나는 몰래 그들을 ‘조르바형 인간’이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역시 특이하시네요”라는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다.

그렇다고 대단히 특이하지는 않다. 방 벽, 대문, 창문틀, 냉장고 등 모든 집안 살림살이에 그림을 그려 놓거나, 방구석에서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거기에 맞춰 기타 치며 노래하는 정도다. 그런데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이라는 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데다, 조금만 선을 벗어나도 가차없이 ‘철없는 짓’이니 ‘민폐’니 하는 소리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조르바형 인간은 좀 특이할 뿐만아니라 이상한 사람, 심지어 사회부적응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민폐란 건 조르바형인간만이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저지르는 민폐는 우리가 흔히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일상적 민폐들, 예를 들어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는 아저씨나 사람이 내리지도않았는데 밀치고 들어와 자리에 앉는 아주머니 류와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단지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할 뿐.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 “예술이란 사실은 마법의 주문… 예술은 우리의 오장 육부에 도사리고있는 어둠의 살인적인 힘을 충동질한다”고 말했던것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남들보다 예술적 충동이강한 것일 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이런 충동은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나역시 고등학생 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조르바형 인간에 가까웠다. 억압에 대한 반작용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빵을 먹으면주는 야광 스티커를 책상에 한가득 붙이는 바람에불을 끄면 내 책상만 환하게 빛났고, 엎드려 자는 것만으로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캐비닛 위에 올라가서누워 자다가 학생주임에게 걸려서 영원히 잠들 뻔했던 적도 있었다. <도덕경>을 읽다가 황사로 하늘이 노랗게 된 것을 보고 갑자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거나, 메탈리카를듣다가 이유도 없이 우산을 접어 손에 들고 비를 젖어 거리를 방황한 적도 있었다.

당시의 나는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아주 약간 벗어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한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였고, 민폐라고 생각하며 나를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대학과 군대를 거치면서 거듭 내 안에 있는 조르바를 거듭 억눌러야 했고, 그 결과 ‘사회생활에 적합해졌다’거나 ‘철들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 자신도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좋은 삶의 방식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나 역시 지하철에서 마주친 아주머니나길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매한가지 민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르바형 인간들이 하는행동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음은 물론이고, 집앞 놀이터에서 깔깔거리며 공차는 아이들마저 얄밉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얼마 전 메탈리카의 공연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껏 소리 내어 노래를 불러보지 못했다면 그가 지금처럼 위대한 보컬리스트가될 수 있었을까?드럼이 부서져라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면 저런 밴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좀 더 일반화하면,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안의 조르바, 다시 말해 예술적 충동을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않는 선’을 기준으로 억눌러왔던 것은 아닐까?”라는의문이었다. 물론, 그 근저에는 ‘어쩌다 내가 공차는아이들마저 관용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을까?’라는한탄이 깔려 있다. 마치 새벽녘에 악상이 떠올라 피아노 앞에 앉은 존 레넌에게 “시끄러워!”라고 소리치는 악덕 집주인이 된 느낌이었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남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것도, 마음껏 기타를 치는 것도, 기분가는 대로 춤을 추는 것도, 노래방이나 클럽에서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지 않으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예술적 충동의 발산이라기보다 그런 충동을 다른 방식으로 만족시켜주는 것에 불과하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적 충동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이 만든 음악과 남이 알려준 춤을 충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존 레넌에게 “노래방이나 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조르바들은 멸종위기에 처했다. 어떤 천재적인 조르바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당신, 우리 안에 있는 조르바를 우리 스스로가 질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내 안의 조르바를 꺼내보았다가도 혹여 이웃에게 방해가 될까 황급히 다시 집어넣곤 하는 걸 보면, 어쩌면 서로가 서로의 조르바를 감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조금만 더 조르바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그‘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을 조금 늘려주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