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정치사상학회 연례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이번 대회는 ‘과학과 정치’를 주제로 도쿄 게이오 대학에서 이틀간 열렸는데, 주제가 주제였던 만큼, 후쿠시마 원전 이야기가 빠질 리 없었다. 마지막 회의 ‘대지진 후의 정치와 정치학’ 세션은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발표자들은 후쿠시마 관련 문제들이 대부분 ‘정치적 문제’라고 해도 좋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토호쿠 대학의 이누즈카 교수는 자연재해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예상되는 위험을 어떻게 판단하며, 또 실제 발생한 위험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를 결정 하는 건 정치의 몫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원전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위험을 판단하고 관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졌었다. 시민들은 관료나 전문가가 “이런저런 위험이 있 지만 충분히 고려하고 대비하고 있습니다” 따위의 판에 박힌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믿는 수 밖에 없었다. 원전의 설계에 대해 이리저리 복잡한 설명을 하면서 “그렇지 않나요?”라고 할때 이래저래서 아니다,라고 답할 만큼 잘 알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러다 원전 사고가 일어나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었던 원전 문제를 떠올려보면, 일본인들이 느낀 배신감도 상상이 간다.
대회 발표자들은 “그게 원래 믿을 만한 게 아니었다” 고 지적했다. 아무리 전문가들이라 해도 예측이라는건 본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예측을 벗어나는 문제라는 건 항상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누즈카 교수는 핵심은 위험을 확실히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이며, 또 누가 그걸 감수하면서 까지 원전을 만들기로 결정했느냐에 있다고 지적한다. 사고가 터지고 나면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것은 시민들인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 심지어 어떤 위험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전문가들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말해왔기 때문에 그 말을 믿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바로 그 전문가들과 관료들이 사고의 한 원인이라고 지목되어 심각한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쿠시마 사태 뒷수습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문제점이 뭔지, 어떻게 해결하는게 좋은지 논의하려 해도 정보가 통제되었다. 늘 그렇듯 “전문가들이 최선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식이었다. 보상 문제도 다르지않았다. 원전으로 부터의 거리에 따라 무 자르듯 지역을 구분해서, 몇 km까지는 얼마, 몇 km까지는 얼마 하는 식으로 보상을 결정했다. 발표자들은 얼마나 보상해주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어떤 보상을 해줘야 하는 건지에 대한 논의조차 없이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사고전의 행태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성토했다.
발표자들은 후쿠시마 사태를 해결하고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방지하려면, 정부 관료나 전문가의 일방적 결정이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민주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문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단순히 결정에 참여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이미 발생한 위험뿐만 아니라 예상되는 위험까지 공동체의 이름으로 떠안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무연고 사회’를 걱정하던 일본에서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대지진 이후 원전 전면 폐쇄를 주장하면서 전국적인 절전 붐이 일었는데, 여전히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이번 자동차세 납부 기간은 꼭 지켜주세요. 세금의 중 일부가 후쿠시마 주민들을 지원금으로 할당되어 있습니다”라는 구청 광고를 봤을 때, 지하철 안에서 “이번 여름엔절전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하세요~”라는 가스발전소 광고를 봤을때, 솔직히 좀 감동했다.
방에 돌아와 밀양 단장면을 생각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물론,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우리는 같은 논리로 지난 수십년간 전국 명산에 일제의 철심보다 더 많은 철탑을 박아왔다. 내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위해 사라진 삶의 터전이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금 단장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할머니들과 한전의 대치 장면 역시 ‘국가 폭력’이라는 책에 한 페이지를 더하는 꼴이 될 것이다. 원전과 송전탑에 비판적인 언론들 역시 여전히 우리 나라발전 구조를 지적하거나 산업체와 정부를 비난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정부가 전력 수급량 운운하지만, 우리나라 전체전기 사용량 가운데 가정이 쓰는 비율은 14%에 불과하고, 문제의 책임은 55%의 전기를 쓰는 산업체들, 그리고 그들을비호하는 정부에 있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발전’해왔으니 14% 의 5000만분의 1, 즉 우리나라전기 생산량의 0.00000028%만큼만 쓰는 나로선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체념해야 할까? 55%의 전기를쓰는 산업체와 그 배후의 정부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문제가 해결될까? 알아서 잘 해결하라고 내버려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후쿠시마 사태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인들은 정부 관료와 전문가에게 모든것을 맡겨 버렸던 것을 반성하면서 모두가 동참하는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 동네만은 안 된다!”는 단장면 할머니들의 처절한 외침이 님비(NIMBY)가 아니라, “내 뒷마당만 아니면 된다”며 할머니들의 뒷마당에 철탑을 박는 걸 묵인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혜택만 즐겨온 우리야말로 님비의 표본이다. 정부와 한전을 힐난하는 목소리는 거세지만 위험을 나누겠다는 목소리, 즉 “우리가 전기 사용료를 더 낼 테니 지중화해주자”든가 “원전과 관련된 비극을 끝내기 위해 절전하겠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 까지 바라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당신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서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 말조차 들은 적이 없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쉽지만, 그것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밀양 송전탑 사태는 할머니들과 정부 간의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0.00000028%만큼의 책임만 갖는 문제도 아니다. 이건 공동체의 문제, 우리들의 문제다. 수많은철탑과 전깃줄이 이미 우리들을 이어주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할머니들의 고향 땅에 철탑을 박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쉽게 잊히는 건, 할머니들 역시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
개인은 국가 전기 생산량의 극히 일부를 사용할 뿐이다. 개인은 전기 문제 같은 건 잘 모른다. 원전 같은 건 전문가에게 맡겨놓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후쿠시마 원전은 폭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