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아저씨, 아니 1950년생으로 환갑을 넘기셨으니 할아버지가 더 적절한 표현일 테다. 이 할아버지가 최근에 큰 사고를 치셨다. 새 앨범이 말 그대로 대박이다.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 있는 역사, 전설, 가왕, 국민가수로 불리던 그가 수년만에 앨범을 냈으니 이 정도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그에 대한 이런 평가들은 ‘현재진행형’의 의미는 아니었다. ‘가왕의 귀환’이라는 말 역시, 그가 한동안 왕좌에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어딘가로 떠나 있어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니까.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우리 기억의 저편, 대중음악의 주변부 어딘가로 밀려나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킬리만자로의 표범>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 등 조용필의 대표곡이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만 봐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일선(가요계)에서 물러났다. 좀 더 시니컬하게 말하면, 서태지와 듀스로부터 시작된 90년대 한국 가요의 지각변동에 의해 ‘밀려났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조용필의 한창때가 70~80년대였다고는 하지만, 80년대 생인 필자에게도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과거형으로 남아있었다. 그 이름만큼이나 어딘가 촌스럽고 구식이라는 인상이었다. 좀 더 나이를 먹고 한국 록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의 베스트 앨범을 사긴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센세이셔널 했겠네, 정도로 평가했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의 음악은 아이돌들이 신식으로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불후의 명곡’으로 취급될 뿐이고, 그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더 많아지면서 조용필 모창은 개인기 목록에서 밀려난 지도 오래였다.
그런 조용필의 노래가 지금, 1993년도 아니고 2013년에 울려 퍼지고 있다. 그를 알던 세대도, 모르던 세대도 입을 모아칭송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여러모로 존경과 감탄을 담아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조용필의 화려한 컴백에 대해, 누군가는 ‘내공’을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역시 유행은 돌고 돈다’고 말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조용필이라는 이름을 뒷받침하고 있는 막대한 인맥과 자본의 힘을 이야기하며 조용필의 성공을 폄하할 것이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이미 성공을거두고 나서 ‘그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라며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는 것은 평론가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이른바 조용필과 ‘양념치킨’에 대한 이야기다.
조용필이 양념치킨을 좋아하는지는 물론 모른다. 양념치킨이라는 음식이 상당히 대중적인 음식이니 아마도 즐겨 먹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조용필과 양념치킨에 대한 이야기는 조용필 19집 <Hello>의 티저가 공개되었을 무렵, 한 친구가 던진 말에서 비롯됐다. “이번 조용필의 앨범은 30년 동안 호텔 주방장으로 일하던 할아버지가 손주를 위해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만들어준 것 같은 느낌이야.” 이후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보다는 양념치킨이 더어울리는데?” 따위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이 대화 중 언젠가 우연히 본 주방장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호텔 주방장을 하다가 은퇴한 할아버지가나왔다. 그 할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조리 보조로 일하다가 호텔 주방장까지 하게 되었다며 인생 역정을 추억했는데, 미군 취사병의 요리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심지어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을 만들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했다. 외국 유학은커녕, 여행도 마음대로 못 가던 시절에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었으니 어쨌거나 당시로서는 나름 ‘정통’ 양식을 배운 셈이었다.
그와 비슷하게 , 조용필은 196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컨트리 앤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9년 미 8군 무대에 데뷔했다. 한국 음악이 아니라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악, 그것도 가장 미국적이라는 컨트리 앤 웨스턴(country and western) 장르의 음악을 연주한 것다. 그의 이러한 경험이 이후 록밴드 활동에 좋은 토양이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조용필 밴드는 미군 부대에서 나와 호텔에서 요리를 시작한 주방장 할아버지와 같은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미국인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입맛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에야 현지와 똑같은 맛을 정통이라고 한다지만, 당시 한국인 대부분은 현지의 맛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정통이라 우겨도 결국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양식이어야 사람들의 입맛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함박 스테이크가 대표하는, 지금은 추억이 된 ‘경양식집’이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의 조용필 음악과 경양식은 그런 점에서 닮아 있었다. 그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내 ‘세련된 서구와 닮아 있으면서도 우리 입맛에 딱이야’라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 대중적 인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슈니첼(schnitzel)이나포크커틀릿(Pork-cutlet), 혹은 코돈브루(Cordon Bleu)가 아니라, 따뜻한 쌀밥에 단무지가 함께 나오는 돈가스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조용필이 ‘록의 대중화’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식 록음악’을 촉발시켰다고 평가해야 하는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조용필과 양념치킨으로 돌아가서 왜 ‘조용필과 돈가스’가 아니라 ‘조용필과 양념치킨’인지를 말할 차례다. 그렇게 흥했던 경양식집들이 하나둘 스러져 간 것은 이길 수 없는 세월의 흐름 때문이었다. 한 쪽에서는 외국 요리학교까지 다녀오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정통’을 배워온 요리사가 외국에서 진짜 양식을 먹어본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고, 다른 한쪽에서는 본토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가 대중을 공략하고 상황에서 경양식집이 설 자리는 없었다.
90년대 조용필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악깨나 듣는다는 사람들은 외국 가수의 음악을 ‘정통’이라며 더 높게 치고, 심지어 ‘한국식’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짝퉁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다른 한 쪽에서는 패스트푸드 음악이 판치고 있었다. 한국 대중음악 씬이 록페스티벌과 뮤직뱅크로 양분되고 있었던 샘이다. 거기서 슈니첼이나 정통 일식 돈가스도 아닌경양식집 <조용필>은 살아남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과감히 업종 변경을 선언했다. 양념치킨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KFC 할아버지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맛있는 양념치킨을 말이다. 사실 조용필의 이번 앨범은 서구 음악을 하면서도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왔던 수십 년의내공이 응집된 결과물이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 해온 것을 다시 한 것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부분 역시 존경스럽긴마찬가지다. 아무튼 양념치킨은 과거의 경양식을 추억하는 부모님도, 정통 서구 음악에 익숙해져 입맛이 까다로운 청년도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양념치킨을 싫어하는 어린이가 있던가?
조용필은 그렇게 보란 듯이 '컴백’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요즘 외국인들이 한국에 가서 가장 먹어보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면, 대개 양념치킨을 꼽는다고 한다. 음식을 음악으로 바꾼다면, 양념치킨의 자리에 조용필이라는 이름을 채워 넣어도충분하지 않을까? KFC나 파파이스, 아니 엠씨 해머(Mc Hammer)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