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년째 가만히 쉬고만 있는 리락쿠마
리락쿠마의 눈은 언제나
“지금 릴랙스하라”고 말한다
리락쿠마교의 교리 역시 그것뿐이다
리락쿠마교(敎). 최근 대안처럼, 등장한 신흥종교다. “나는 리락쿠마를 믿습니다”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지하철에서 “리락쿠마를 믿으십시오. 아니면, 지옥 불에 불탑니다!” 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없어 신도 수는 도저히 파악이 안20된다. 리락쿠마교의 신도들은 대체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심지어 스스로가 리락쿠마교의신자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지금부터 이 은밀한 종교, 리락쿠마교의 실체를 알려줄 테니 본인이 신도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리락쿠마교의 중심에는 ‘리락쿠마’ 가 있다. 리락쿠마(リラックマ)는 일본 San-x 사(社)에서 제작한 캐릭터로, 직역하면 ‘릴랙스한 곰’ 정도가 될 것이다. 한 번이라도 캐릭터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리락쿠마는 설정 상 실제 곰이 아니라 봉제인형이다. 리락쿠마 홈페이지의 설명에도 “OL(오피스 레이디의 일본식줄임말) 카오루 상의 집에 어느 날갑자기 등장한 봉제인형” 이라고 되어 있다. 등에 지퍼가 달린 이 곰 인형은 설정 상 살아 움직인다. 여기까지만 해도 별로 놀라운 건 아니다. ‘움직이는 인형’ 캐릭터는 흔하디 흔하니까. 그런데 이놈의 리락쿠마는 움직일 수 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실제 곰과 달리 생존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웬만한 인형 캐릭터(예컨대 <토이 스토리>의주인공)만큼도 움직이지 않는다. 항상 릴랙스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셈이다.
리락쿠마의 릴랙스가 얼마나 ‘품격’ 있는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 한 편을 소개하면 이렇다. 리락쿠마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란 쿠션을 베고 누워서 혼자 중얼거린다.“뭔가 좋은 일 없으려나.” 그러더니 대뜸 자문자답(自問自答)한다.“뭐 좋은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게 세상일이긴 합니다만. 나쁜 일이 없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그러고는 “잠만 자는인생이 뭔 소리람?!”이라며 자아성찰로 급 마무리. 이내 “쿨”하고 자버리는 것이다. 리락쿠마의 이런 행태는 일이 년의 문제가 아니다. 리락쿠마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 2003년 9월이기 때문에, 올해로 10년째 릴랙스하고 있는 셈이다.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라든가 ‘내일의 도약을 위한 재충전’ 같은 개념이 아니라, 그냥 쭉 릴랙스만 하고 있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 한다는데, 리락쿠마에게 변한 거라곤 릴랙스하는 자세 정도일뿐. 사실 리락쿠마는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릴랙스 방식을 연구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 쪽 팔로 머리를 괴고 누워 있는 자세를 비롯해, 천정을 보고 벌렁 드러누워 있는 자세, 엎드려서 과자를 먹고 있는 자세, 퍼질러 앉아서 TV를 보는 자세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릴랙스 자세의인형이 판매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니엘 레비튼(DanielLevitin)이 10000시간이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고 말했다는데, 리락쿠마쯤 되면 가히 ‘릴랙스의 대가’라고 부를 만하지 않을까?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필자도 처음부터 리락쿠마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리락쿠마의 생김새가 좀 귀엽긴 하지만, 그렇다고 “카와이이~”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침대 머리맡에도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누워 있는 자세의 리락쿠마 인형이 하나 있는데, 그 자세가 어찌나 편안해 보이는지 얄미워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녀석이라면 뻔뻔한 표정으로 “아, 지금까지 너무 릴랙스하느라 피곤하니 이제 그만 자야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초점 없이 릴랙스한 그 눈을 자꾸 바라보다보니, 어느 순간 리락쿠마가 와불(臥佛)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피곤에 절어서 ‘이제그만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리락쿠마와 눈이 마주쳤는데, “무엇을 그리 서두르느냐, 중생아. 릴랙스 하거라 ”하고 말하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릴랙스할 수 있는 걸까?” 일종의 존경심마저 자라난다.
내가 리락쿠마교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그때쯤이다. 처음에는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경단,핫케이크, 오므라이스, 푸딩은 꼭 챙겨먹고, 또 음악 감상, TV 시청, 온천욕도 빼먹지 않는 그 삶이라니. 그래서 리락쿠마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누워 있지만, 귀여우니 용서되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없고, 하루 종일 빈둥거려도 “으이그 이 화상아”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귀여운 존재가 된다는 건, 아기 때는 가능했던것 같은데,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아무래도 이 방법으로는리락쿠마처럼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대신 어른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으니 이름 하여 ‘안 벌고 안 쓰기’다. 오해를 피하고자 부연 설명을 덧붙이면 ‘안 버니까 안 쓴다’가 아니라 ‘안 쓰니까 안 벌어도 괜찮지 않을까’다. 그 미묘한 차이를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열심히 많이 벌어놓으면 나중에 리락쿠마처럼 살 수 있지 않나요?”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모르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열심히 한다고 충분히 벌 수 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역설적으로 열심히 살수록 좋아하는 일을 할 시간과 여유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리락쿠마의 눈은 언제나 “지금 릴랙스하라”고 말한다. 리락쿠마교의 교리 역시 그것뿐이다. 그렇게 ‘안벌고 안 쓰기’를 시작하자 삶에 변화가 일었다. 돈을 벌면 여유가 생길 거라는 당초의 기대와는 반대로, 돈을 덜 벌고 씀씀이를 조금 줄이자여유가 생겼다. 아침에 햇살 아래 빨래를 널어놓고 커피를 한 잔내린 다음, 빨래가 마르는 걸 천천히 지켜볼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언제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고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있거나 산책하고 싶은 곳이 있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차비가 없으면 좀 걸으면 그만이고 근사한 식사를 하고 싶으면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그만이었다. 마지못해 혹은 시간에 쫓겨서 ‘한 끼 때우려고’ 하는 요리가 아니니까 그마저도 즐거웠다. 혹시나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릴랙스하면 그만이다. 리락쿠마처럼.
이렇게 좋은 리락쿠마교인데, 정말 좋은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리락쿠마교 사원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생각도해봤다. 거대한 리락쿠마 동상도 세우고(리락쿠마니까 ‘눕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성공에 눈이 멀었다가 뒤늦게리락쿠마교에 눈뜬 사람들을 위한 ‘릴랙스 재활 클리닉’을 운영 하는 것이다. 중증 환자들을 위한 ‘아무것도 안 한다고 불안해하지 않기’ 강좌에서는 커다란 온돌방을 마련해두고 리락쿠마식 릴랙스 자세를 하나씩 따라 해본다거나, 다 같이 배 깔고 귤을 까 먹는다거나 하고. 생각해보니 사원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데, ‘안 벌고 안 쓰기’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아무튼 리락쿠마처럼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리락쿠마교의 신자가 될 수 있다. 리락쿠마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다. 그냥, 지금 릴랙스하면 된다. 그러면 조만간 “뭐 좋은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게 세상일이긴합니다만. 나쁜 일이 없는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여유가 당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
릴랙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