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 연세대학교 국문과 학부-석사-박사를 마치고 모교의 조교수-부교수-교수를 한 부러운 입지적인 인물이다.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은 1951년생인데, 그 엄혹한 시절에 개인의 욕망에 집중하는 글을 그렇게 집요하게도 쓰셨다. 어찌나 잘 썼던지, 1992년에 세계 최초로 외설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검찰에 긴급 체포되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의 나는 읽어볼 수 없는 종류의, 읽으면 ‘으흐흐으흐으흥’하고 콧김을 내뿜게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 읽어 볼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그 내용을 아는 것은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흠흠.

야설작가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것을 일종의 투쟁으로 봤다. 마교수는 “운명과의 싸움이란 결국 정신적 극기와 육체적 절제를 강요하는 전통윤리와의 싸움이요, 금욕주의와의 싸움이다”라고 말한다. 그의글쓰기는 개인적으로는 운명과의 싸움이었고, 사회적으로는 금기와의 싸움이었다. 정치적 자유를 외친 민주화 운동세력과는 구분되는 방식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만의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를 외쳤던 것이다. 그가 체포되었던 것은 단지 소설이 외설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마교수가 최근 다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한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수업교재인 자신의 저서를 반드시 구입하고, 그영수증을 의무적으로 제출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논란거리도 안된다”고 일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언론에선 연일 ‘충격’, ‘파문’, ‘경악’ 등의 수식어를 사용해가며 신나게 떠들고 있다. 그러니 나도 숟가락 좀얹어보자.

엄청나게 다양한 의견이 난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여기저기서 떠들어대고 있는 이야기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수 있다. 각각을 학생 책임론, 교수 책임론, 구조론으로 명명하고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런 식이다.

1. 학생 책임론 : 대체로 마광수 교수의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이쪽에 서 있다. 대학생이라는 자식들이 책은 안사보고술이나 쳐마신다고 손가락 질 하는 사람들이다. 마교수 본인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마광수가 마음이 약해서 학점을 잘 준다더라, 요새 애들 표현대로 하면 ‘널널’하더라, 수업도 개판이다, 결석계 내도 된다고 하더라”는 식의 소문만 듣고 수업에놀러 들어간 애새끼들 때문에 강의 수준이나 대학 꼬라지가 말이 아니라고 분노한다. 학생이 책을 안 들고 수업에 들어가는 건 군인이 전쟁터에 총을 안 들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식의 진부한 말도 빼놓지 않는다. 그럼, 총알은?

2. 교수 책임론 : 마교수의 책임을 묻는 의견 중에, “노교수가 돈독이 올랐나?”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의견은 논할 가치가없으니 제외하자. 혹은 내가 주장했던 바 처럼, 마교수의 그간 행태를 감안했을 때, 갑자기 ‘영수증 패티쉬’가 생겼을 수도있다는 식의 정신병리학적 해석도 제외하자. 그러나 지인 정모군의 주장처럼 ‘잘못된 지표(wrong indicator)’에 대한 책임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정모군은 “영수증은 학생이 ‘새’ 교재를 ‘샀다’는 행위를 증명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요지는 이렇다. 교수는 학생들이 수업에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지 확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다만, 수업에 필수적인 교재를 잘읽어오는지를 감시하는 차원이었다면 영수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검사했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교수도 동의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한 걸로 알고 있다.

3. 구조론 : “모든 학생들이 그렇진 않아요” “그럼요. 나도 압니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게 문제죠”라며 모두 환하게 웃으며 화해하고, 구조에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입장이다. 이런 일이 논란이 되다니 참 슬픈 일이다 – 오죽하면 그랬겠냐, 학생들이 요즘 책을 너무 안 본다 – 그게 다 학점과 스펙 쌓기에만 치중하는 대학생들의 문제다 – 그게 대학생들의책임이냐 우리사회가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 –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장래가 걱정된다 – 인문학의 구조적 위기다– 주저리주저리 어쩌고저쩌고. 뭐 이런 식 말이다. 이쯤가면 그냥 그렇다. 묻고 싶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사보던 시절이있었던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세 가지 입장을 정리해놓고 보니, 아무리 살펴봐도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대학다니던 10년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년 전이라고 달랐을까? 아니, 더했을지도 모른다. 대학생들은 더 가난했고, 수업보다 데모가 더 익숙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옛날엔 어땠는데”하는 이야기도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어쩌면 논란의 시작과과정, 그 결과까지 하나같이 진부하다는 게 이번 논란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광수 교수는 성에 대한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발언들로 유명해졌다. 혹자는 “마광수는 한국 사회가 가지는 ‘관용의 정신’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하는 일종의 잣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수업에서도 자유, 저항, 관용 같은 말들이 자주 등장할 것이다. 적어도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익히 알다시피, 실제로 600명이나 참여하는 그수업은 자유롭지도 않고, 저항정신도 표출되지 않고, 관용도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아니다, 아니야. 우리가 그들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닝겐들’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복선이 있는건 아닐까?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야!”라든가, “절름발이가 범인!”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그 이름하여, 학생보이콧설과 마교수 복선설!

4. 학생 보이콧설 : 소싯적 마교수 본인이 그러했듯이, 학생들이 그의 권위(교수와 대학이라는 그 엄청난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그의 책을 보이콧했던 것이다. “예술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되 솔직한 본능에 맞춰 추구하는 것이고, 부질없는 죄의식이나 위압적 도덕률에 굴하지 않고 상상적 창조행위를 통해 진부한 사회규범들을 무너뜨리는것이다”라는 마교수의 말처럼, “진부함을 무너뜨리라는 당신, 당신의 책, 그리고 당신의 강의마저 이젠 진부해!”라고 말하면서 (혹은 “야설의 시대는 갔어! 이제 야동의 시대다!”라고 말하면서) 그와의 단절을 추구했던 것이다. 600명이나되는 학생들이 박 터지게 수강신청 전쟁을 치러놓고 단체로 그 수업을 보이콧 하려는 ‘심오한 뜻’을 모르고, 마교수가 꼰대처럼 반응한 것이다.

5. 마교수 복선설: 마교수는 사실, 일부러 유치하게 “너, 책 샀어? 안 샀어?”라고 따져 물었다. 공론화되지만 않았다면, 회초리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대학의 수준이 이정도로 전락한 것이 학생들의 책임만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즉, 대학 교육의 전반적인 수준저하에는 이처럼 유치하게 행동하는 교수들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혹은 육성회비를 안냈다고 교실에서 쫓겨나서 뒷산에 앉아 눈물을 훔쳐야만했던 시절, 책을 안 챙겨오면 선생이 싸다구를 왕복으로 날리던 그 엄혹한 ‘박통’ 시절이 다시금 도래했음을 경고하는 그만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마교수가 문학이 아니라 행위예술의 형태로 표현한 것도 모르고, 학생들이 ‘찐따’ 인증을 한 것이다.

하아. 이만큼이나 헛소리를 했는데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노교수가 오늘날 이런 이야기로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게 ‘거시기’하다.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마교수를 보이콧할 학생들이었다면 굳이 그의 강의를 신청하지도 않았을 테고, 대학의 수준저하와 시대의 엄혹함에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였다면 마교수가 굳이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당신도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논란을 기회로 삼아, 마교수가 <즐거운 사라>의 새후속작을 집필해주길 바랄 뿐이다. 대학생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사는 날이 오길 바라면서, 제목은 <즐겁게 사라>쯤으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