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뭐든지 요약한다. 부장님께 제출할 보고서는 물론이고, 뉴스에선 대통령 취임사도 요약한다. 700페이지짜리 두꺼운 책이나 3시간짜리 영화에 대한 감상도 ‘50자 요약’이 기본이다. 온라인에선 140자 트윗(tweet)보다 긴 글의 제목엔 ‘스압주의(스크롤 압박 주의)’를 경고하고, 마지막엔 ‘한 줄 요약’을 붙이는 게 매너다. 심지어 책을 한 페이지로 요약하는 ‘원페이지 요약 전문가(Onepage Summary Professional)’라는 직업도 있단다. ‘유행성 요약 강박증’이라도 돌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요약해봐"

전국, 아니 전세계 모든 대학 강의실에서 2억3천만번 정도 반복된 말이다. 교수님들은 왜 하나같이 그렇게 ‘한마디 요약’을좋아하시는걸까? 선문답도 아니고, 아무리 고민해도 한마디로 답하기 힘든 문제를 왜 자꾸 요약하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니들이 잘 모르니까 대답을 못 하는 거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대학을 졸업하면 “한마디로 요약해봐”로부터 벗어날 줄 알았건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대학원에서는 더 자주 그 말을 들었다. 그 뿐인가. 매주 수업시간에는 지정된 책이나 논문을 읽고 한 두 장으로 ‘요약’해야했고, 논문 본문보다 국문 ‘요약’과 영문‘요약’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으며, 논문 심사 때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이 한 마디로 뭐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지 못했을 때 견뎌야 할 불호령의 강도와 빈도가 높아진건 말할 것도 없다.

군대는 좀 다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심하다. 내용과 맥락을 다 안다는 전제 하에 핵심을 쓰는게 요약인데, 상관이 내용과 맥락을 잘 모르니 요약해놓고 그 밑에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물론, 그 설명도 요약했 다. 보고서 내용은 이미다 써놓 고 한 글자라도 더 줄여보자며 부서 전체가 밤늦도록 매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한민국 국방에 있어 매우 중요하며 막중한 책임감 을 요구하는 일의 태반은 요약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비디오 산책> 만 보고 영화 한편을 다 봤다는 이들

책 요약으로 독서를 대신하는 사람들

요약은 요약일 뿐 내용이 아니다

콘텐츠의 핵심은 요약이 아닌 맥락에서 나온다

"물론, 요약은 필요하다"

좋은 요약은 전체적인 내용과 맥락의 핵심을 꿰뚫는다. 아주 어려운 책이나 영화인데 간단한 요약을 읽었더니 비로소 전체적인 내용이 이해되는 것도 그때문이다. 요약의 본질은 요약된 결과물 그 자체 라기보다 요약하는 것, 즉 요약이라는 행위에 있다. 한 문장으로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핵심을 파악 하는 가장 좋은방법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는것은 그것을 최대한 단순하면서도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도록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수님 들이 수업시간에 “한 마디로 말해봐”를 반복하는 이유, 대답하지 못했을 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업을 통해우리는 핵심을 파악하고 전달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전체적인 내용과 맥락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하는 요약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문제는 내용과 맥락을 모르는 사람에게 요약된 정보만 제공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아무리 좋은 요약이라도, 내용과 맥락을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의미 전 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그리스인 조르바』는 ‘룸펜이 자연인을 만나 외딴섬의 광산을 개발하려다 실패해서 전 재산을 탕진한 이야기’이고 『운수좋은날』은‘ 놈팡이 남편이 부인 덕에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아보려 했는데, 부인은 지병 때문에 사망한 이야기’가 될 뿐이다. 반면에 원작을 읽은 사람들은 이 요약에서 웃음포인트를 찾거나, 어떤 내용이 빠져있는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공서나 회사에서 이런 식의 ‘요약 및 보고’가 강조되는 것은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다. 관료 집단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처리해야할 정 보가 많고,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다 읽어야 한다면 아무일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핵심만 요약해서 보고하길 바라는 것이다. 때문에 집 단의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한 집단 내에서의 관료적 위계가높을수록 요약 강박증이 심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요즘 높으신 분들은 너무 바빠서 <레미제 라블> 전체를 다 보지는 못하고 매번 <비디오 산책> 만 보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요약이 잘 된 <비디오 산책>이라도, 실제 영화를 본 사람이 아니라면 구체적인 내용이나 맥락을 알수 없고, 추측할 수 있다 치더라도 오해나 곡해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데 높으신 분들은 <비디오 산책>만 봐놓고‘영화 다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핵심만 겨우 파악한 주제에 전체를 다 아는 ‘척’, 이해한‘척’ 하면서 국회나 청문회장, 혹은 대국민담화에서 종이 한 장 흔들면서 당당하게 말한다. 수학 공식 외우듯이 남이 요약해준 핵심만 달달 외워도 말은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내용과 맥락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증 요약 강박증 환자들"

유행성 요약 강박증은 이처럼 핵심만 파악하는 데 만족하고, 맥락과 내용쯤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니 남이 요약해준 지식만 섭취하게 되고, 그만큼 생각도 간략하고 간소해지는 것이다. 중증 환자들은 내용과 핵심이 연결된 형태가 아니라, 핵심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형태로 뇌 구조가 변 형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중증 환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자리에 앉아들 있다. 너무나도 중요하고 그래서 많은 고민이 필요한 문제를 누군가한 장짜리 보고서로 요약해주면, 그걸 읽고 처리해버리 는 것이다. 누가 좀 자세히 설명을 덧붙이려고 하면, ‘다 안다’고 소리친다. 청와대건 국회건, 회사건 군대건, 중요한 일들이 그렇게 간소한 생각을 거쳐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매일 처리되고있는 것이다.

유행성 요약 강박증이 진정 무서운점은 이게 ‘유행성’이라는 것이다. 높으신 분들만 이 질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요약 보고서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 높으신 분이 되면,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만들어 준 요약문만 앵무새처럼외우게 될 것이다. 유행성 요약 강박증은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유행하고 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우리는 스스로 해석하고 요약하 는 것보다 남이 요약해준 것을 섭취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긴 글은 읽기도 싫고 드라마는 신문기사로 내용만 파악하면 된다. 말이 조금만 길어져도 “핵심만 말해!”라며 짜증 섞인 불평이 터져 나오기 일쑤다. 매체들(대학내일도 포함)은계속해서 요약된 정보를 제공하고 사람들은 점점 요약만 원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행성 요약 강박증이 의심된다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길 바란다. 우리가 안보고도 본 척, 안 읽고도 읽은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온갖 서평, 요약문, 단신, 한 장짜리 보고서는 정말 잘된 요약일까? 스스로 핵심을 파악하지 않는 상황, 내용과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어떤 기준으로 그 ‘요약’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