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커다랗고 사나운 괴물이 있다. 용자가 그 괴물의 시선을 붙잡는 사이, 다른 동료들이 사력을 다해 괴물을 공격한다. 한 번 괴물이 포효할 때마다 기절할 것 같은 충격이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들이 버텨낼 수 있는 건, 묵묵히 뒤에서 그들을 도와주는 힐러(Healer)가 있기 때문이다. 주로 게임에서 사용되던 이 용어가 일상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혹시 우리 눈앞에 커다랗고 사나운 괴물이 나타났기 때문은 아닐까?

치료자,힐러를 자처하는 이들은 TV를 통해 책을 통해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지친 마음을 다독이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아픈 현실이고 제자리다 진짜 힐러는 TV 속에 있지 않다 진짜 힐러는 당신 옆에 있다

우리 눈앞의 커다랗고 사나운 괴물, 그 일상 속 괴물의 이름은 ‘삶’이다. 그래서일까, 흔히들 하루하루의 삶을‘치열한 전투’에 비유한다. 모두들 해가 뜨기 바쁘게 전투를 시작해 밤늦게야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그나마 일찍 전투가 끝나는 날이면 술잔을 기울이며 그 괴물이 얼마나 강력하고, 그 전투가 어찌나 힘든지에 대해 푸념한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내일 있을 전투를 생각하면 피곤한 몸을 뒤척이기 일쑤다. 몸은 쉬고 있을지라도, 다시 돌아가면 그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피로가 가시질 않는다. 삶이라는 괴물이 강력한 탓도 있겠지만, 이 괴물과의 전투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압박감 때문이다. 그렇게 삶과의 전투가 반복될수록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누적된다. 가끔씩 돌아오는 휴일로 겨우 버티고는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괴물에게 짓눌려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게 편할지 몰라’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아주 심각한 상태다. 대대적인 힐링(Healing)이 필요한 상황이다. 누군가는 삶이라는 괴물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피한다. 그곳은 햇살이 찬란한 남국일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 콘서트장일 수도 있고, 방구석 어딘가, 인터넷의 바다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다음 전투를 기약하면서 새로운 아이템(예를 들어 새 스마트폰)을 사거나, 보다 나은 전투를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으로 힐링을 대신하기도 한다.

힐러를 찾아라 정말 힘들 때는 그나마도 여의치 않다. 어딘가로 떠날 시간도, 무언가를 살 돈도 없다. 피로가 너무 심하면, 시간과 돈이 있어도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가 사라진다. 쉽게 말해 우울증의 늪에 빠진 것이다. 문제는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두가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들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은 이를 가리켜 ‘피로 사회’라고 명명한다. 우울증환자가 다른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사람들은 이제 이 모든 피로를 일거에 날려버릴 전문적인 힐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기다렸다는 듯이‘그들’이 등장했다. 소위 멘토라고 불리는 그 힐러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멈추면 비로소보인다’. 좀 더 긴 버전으로 바꿔 말하면, 이렇다. ‘당신의 고통을 이해한다. 누구에게나 삶과의 전투는 힘들다. 나 또한 그랬다. 지치고 힘들어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그 괴물을 과대평가하고 나의 능력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지당한 말씀이다. 인생사 힘든 것은 당연하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노 긍정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짜~즈~을 내~어서~~ 무~얼 하~나~~~”

힐러의 배신 “그래, 이제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시 전투에 나가자!”이렇게 마음먹었건만, 저 커다랗고 사나운 괴물에게 한 방 세게 맞으면 다시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진정해! 긍정적 마인드!” 욕실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기 최면을 걸어봐야 효과는 그리 길지 않다. 그 괴물은 한심한 성적표, 쥐꼬리만 한 시급, 불합격 통지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낯선이 의욕설 등으로 계속 공격을 퍼붓는다. 피해 입은 내 몸을 치료해 주고, 때로는 괴물의 강력한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게임 속힐러들과 달리, 현실의 힐러들은 버튼을 누르면 “알라뷰~”소리를 내는 곰 인형처럼 “넌 할 수 있어, 다시 일어서!”라고 반복할 뿐이다. ‘힐링이 안 되는 건 내 탓이다. 내가 충분히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쯤가면 병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중증 우울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기껏 전문 힐러라고 시간과 돈을 써가며 귀 기울였더니, 힐링은커녕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줬다고 분노해야 마땅하다. 혼자서 사색을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왜 힐러를 찾겠는가? 아니, 애초에 긍정적 마인드만으로 해결 안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힐러를 찾은 것아니었나? 미국의 사회비평가 바버라에런 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그의 책 『긍정의배신』에서 이런 긍정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와 철저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으며,긍정주의가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에런라이크의 지적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힐링의 단면을 노골적으로 지적한다.“지금 당장 가능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뿐이다. 현실을 기껍게 받아들이고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업이 해고된 노동자들과 과로에 시달리며 아직 버티고 있는 직원들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 곧 긍정적인 사고다.”

파티를 맺어라 내가 충분히 노력했다면, 혼자 고군분투해봤다면,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전투를 통해 얻은 피로와 우울증은 정말 내 탓일까? 저 괴물이 원래 저렇게 커다랗고 사나웠었나? 저 괴물과는 혼자 맞서는 수밖에 없는 걸까? 괴물과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길들이거나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이런 의문에 명확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의문을 통해 무조건적 긍정이 갖는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다. 긍정이데올로기가 말하는 괴물과의 전투가 그저 때리면 맞고, 맞아서 생긴 상처를 핥는 것에 불과했다면, 비판적 의문은 진지하게 공략법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 속 괴물 공략은 파티를 맺는 것에서 시작한다.함께 싸울 동료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힐러다. 게임이든 현실이든, 뒤에 숨어서 “니들이 레벨/스펙이 낮아서 그래”라든가 “원래 그런 거니까 잘버텨봐”라고 말하는 가짜 힐러 말고, 진짜 힐러를 구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나를 부추기고 내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내 옆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괴물의 공략법을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친구야말로 진짜 힐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