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토호쿠(東北) 이시노마키(石卷) 시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토호쿠 지역은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곳이다. 원전 붕괴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후쿠시마(福島)도 토호쿠 지역에 속한다. 도시를 덮친 바닷물로 이시노마키 시에서만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는 신속히 복구가 이뤄졌지만 곳곳에 남은 재난의 상처는 마음 깊은 곳을 묵직하게 내리쳤다. 전쟁, 기아, 쓰나미. 우리는 전 세계의 재난을 시청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각 재난당 2분씩 말이다. 2분 동안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후 다음 뉴스로 넘어간다. 텔레비전 바깥의 삶은, 적어도 현대 대한민국인에게는 평온 무사하다. 우리는 전 세계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줄 알겠지만, 경험이 결여된 인스턴트 공감은 그 깊이가 얕다.

처음 TV에서 이시노마키 시의 모습을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분명하진 않는데, 그때 난 식당에서 작은 TV로 그 장면을 목격했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바닷물과 순식간에 쓰러져가는 건물들, 그리고 화면에 비춰지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각자의 종말을 맞았을 사람들까지. 재난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TV 화면에 비춰지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들 한참 동안 수저를 놓고 입을 반쯤 벌린 채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TV 속에서 주민들의 대피를 촉구하는 여자 공무원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침착했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탄식은 진정 슬퍼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어머나. 어쩌니. 저걸 어째. 아휴. 쯧쯧쯧.” 그러나 쓰나미가 TV에서 사라지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금세 타인의 종말을 잊고 다시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크게 탄식하던 주인아주머니는 단골손님과 즐거운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식당 안을 가득 메웠던 애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타인의 종말은 타인의 몫 독일의 철학자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s Bolz)는 그의 책 『미디어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이미 매스미디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를 접할 수 없게 되었으며, 매스미디어를 통해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TV에 나오는 전쟁, 기아, 질병, 자연재해 등을 보면서 “저게 남의 일이 아니구나”라든가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공감의 확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할수록 공감의 깊이도 점점 깊어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타인의 종말을 글로 읽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 그리고 SNS를 통해 직접 듣는 것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공감의 시대(2010, 민음사)』에서 이러한 현상을 지목하면서 “세계 자체는 보편인의 광장으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식당에서처럼, TV를 본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느낄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식당에서의 경험은 내게 여진(餘震)과도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아무리 ‘리얼(real)’하게 종말의 장면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또 그 장면을 보면서 안타까운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타인의 종말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몫이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의 재난을 각 재난당 2분씩 경험한다. 2분 동안 슬퍼하고 안타까워 한 후 다음 뉴스로 넘어간다.

재난을 소비하다 볼츠는 사람들이 자연재해처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볼 때 무력감을 느끼지만, 일차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이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TV에 비친 재난 장면에 압도당하지만 채널을 돌리면 그 장면을 쉽게 회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통제할 수 없는 재난을 통제된 방식으로 전해 듣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안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구 반대편에 저렇게 끔찍한 재난이 발생했는데, 내가 보고 있는 TV 뉴스 프로그램은 내일 같은 시간에 여지없이 방송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아가 볼츠는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를 인용하면서 “재난에 대한 뉴스는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소비의 사회』에서 보드리야르가 “매스커뮤니케이션은 […] 거짓 비장감을 돋우고 […] 평온 무사한 일상생활의 진기함을 강조한다”고 지적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볼츠에 따르면, ‘감정적 동조’의 태도는 바깥에서 발생한 불행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이 즐거움에 대한 보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머나. 어쩌니. 저걸 어째. 아휴. 쯧쯧쯧”은 이러한 태도의 전형적 사례인 셈이다.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타인의 종말을 제공하고,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면서 삶을 지탱해가고 있다. 그렇기에 매스미디어가 재난을 팔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통해서 돈을 번다고 비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TV에서 타인의 불행이 반복될수록 우리가 그것에 민감해지기보다 둔감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호네스(Axel Honneth)는 “미디어가 동감 혹은 분노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불러일으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개입(involvement)을 유도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제 TV에 나오는 웬만한 재난은 그다지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볼츠는 이를 “공포에 대한 대비 훈련”이라고 명명한다.

재난의 민낯 내가 찾아간 이시노마키 시는 TV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도시 한복판까지 밀려와 있던 난파선은 치워진 지 오래였고, 도로나 공장, 주택가 역시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다만 도로를 따라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곳에 쓰레기가 차곡차곡 산처럼 쌓여 있었고, 도시치고는 건물이 드문드문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날의 지진과 쓰나미로 발생한 일본 전역의 사망자가 1만 4000명 정도이고 그중 이시노마키 시의 사망자가 1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까만 돌무덤들이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의 반응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나. 어쩌니. 저걸 어째. 아휴. 쯧쯧쯧.” 버스에서 내려 바다가 멀리 보이는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앞에 섰다. 초등학교 건물 전체는 화재로 검게 그을린 상태였다. “우리들은 지지 않아!”라고 적힌 현수막이 힘없이 걸려 있고, 그 아래 콘크리트 바닥엔 가까스로 형체만 남은 물건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 재가 묻어 엉망이었지만, 한때 사랑받았음을 증명하듯 손때 묻은 곰 인형과 누군가 자랑스레 목에 걸고 뛰어다녔을 법한 조잡한 메달이 눈에 들어왔다. 한 가족의 집이 서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세워진 비석의 글자를 눈으로 읽으면서 타인의 종말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눈앞의 압도적 재난 앞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쓰나미의 직접적인 흔적은 많이 지워진 상태였지만, 압도적 재난이 훑고 간 그 장소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스미디어가 주지 못하는 공감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도 꼭 가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