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베가 행성 연합군에 의해 선한 프리드 행성이 멸망했다. 베가 행성 연합군은 프리드 행성의 과학기술을 이용해 원반형 괴수를 제작하지만 프리드 행성 왕자 듀크는 그것을 몰래 훔쳐 타고 지구로 피신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베가 행성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지구 침략을 시작하고, 듀크는 제2의 고향이 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적들과 싸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나가이 고(永井豪) 원작의 애니메이션 그랜다이져(원제: UFO 로보 그랜다이자)의 줄거리다. 지구를 지키는 그랜다이져는 사실 나쁜 놈들의 로봇이었던 셈이다.
그랜다이져를 처음 봤을 때, 어린 마음에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모름지기 로봇 만화라면 착한 로봇과 나쁜 로봇의 싸움 아닌가? 로봇을 조종하는 사람이나 로봇을 만든 사람 역시 착한 쪽과 나쁜 쪽으로 확연히 구분돼 있었다. 착한 박사가 착한 목적으로 만든 로봇이 나쁜 박사가 나쁜 목적으로 만든 로봇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권선징악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쁜 박사가 나쁜 목적으로 만든 로봇을 훔쳐서 착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는 스토리라니! 이쯤 해서 ‘과학의 중립성’에 대한 나의 믿음이 시작됐다. 과학을 바르게 사용할 것인지 그릇되게 사용할지는 사용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 말이다. “그랜다이져를 봐.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거야.”
나쁜 로봇은 없다 ‘과학’은 넓은 의미에서 ‘사물의 현상에 관한 보편적 원리 및 법칙을 알아내고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 체계나 학문’을 말한다. 보편적 법칙을 밝혀내야 하기에 그 방법 역시 보편적 동의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근대 이후엔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증명하는 게 상식이 됐다. 누군가 신께서 말씀하셨다고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해도 증명이 안 되면 과학이 아니다.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도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된 법칙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보통 과학을 ‘객관적 기준’으로 이해한다. 이 연장 선상에서 과학의 중립성이라는 말에는 ‘과학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론도 포함돼 있다. 특정한 가치관이나 편견에 사로잡혀서 관찰이나 실험 결과, 즉 과학적 방법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과학의 중립성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베버(Max Weber)가 말한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 간의 엄밀한 분리에 기초하고 있다. 사실의 세계는 존재론적 진술(“…이다”)의 세계이며, 가치의 세계는 당위론적 진술(“…해야 한다”)의 세계를 말한다. 무엇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사실의 세계, 무엇이 옳냐 그르냐는 가치의 세계다. 베버는 과학은 존재론적 진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며, 존재론적 진술로부터 당위론적 진술을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y)’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으로부터 어떤 도덕적 법칙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죄가 없다 잘못 이용한 사람이 죄일 뿐 우리가 흔히 듣는 과학의 중립성 논리다 그런데 사실 과학은 애초에 중립적일 수 없다 사람이 과학을 연구하고 과학은 사람을 좌지우지 한다
이런 맥락에서 베버는 그의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자연과학은, 만약 우리가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답을 줍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우리가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해야 하는지 또 지배하고자 하는지의 여부, 그리고 이 지배가 궁극적으로 도대체 의미가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제쳐놓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즉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는 중립적일까? 과학이 그 연구 방법의 측면에서 중립성을 가지며, 또 가져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위자, 즉 과학자가 어떤 주제를 탐구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어떤 목적으로 연구하는 것인지는 중립성을 따질 수 없는 부분이다. 과학자가 연구 주제를 선택하는 행위에는 자의든 타의든 어떤 동기, 관점 혹은 의도 등이 있기 마련이다. 하버마스는 가장 순수한 과학의 형태로 일컬어지는 자연과학에서조차 ‘이 기술이 유용한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고 말한다. 과학의 중립성이 곧 과학자의 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껏 과학기술을 사용한 결과로 발생한 악을 과학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배워왔다. 과학에 대한 탐구 혹은 과학기술은 중립성을 가지기 때문에 과학기술 그 자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 사용되어 많은 사람이 죽게 된 것이 다이너마이트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지클론 B가 아우슈비츠 대학살에 사용되었지만 그 화학약품을 개발한 프리츠 하버 그리고 이란과 북한에서 핵폭탄을 개발하고 있는 과학자들 역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프 맥마한(Jeff McMahan)은 그의 책 Killing in War』(2009)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법무관이나 의무병은 인명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전투원(combatant)으로 분류되고, 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나 무기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군복을 입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비전투원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전투원이기 때문에 전시 살상의 대상이 되지만 후자는 민간인(civilian)이기 때문에 보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쟁의 파괴적 양상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친 쪽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결과에 더 큰 책임을 갖는 쪽은 누구인가?”
아인슈타인 반성하다 과학 발명의 결과를 모두 과학자 책임으로 돌릴 순 없다. 하지만 순전히 과학적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일지라도, 그 연구의 의미가 무엇인지, 연구를 통해 도출된 과학적 발견이 초래할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안 된다. “과학자들은 어떠한 가치판단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과학의 중립성을 곡해하는 논리다. 아인슈타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촉구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파시즘의 지배를 막기 위해 파괴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이 핵무기 개발의 기초를 제공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핵무기의 참상을 목격한 후 그는 1955년 7월 9일 ‘반전 반핵운동의 정신적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The Russell-Einstein Manifesto)」을 발표했다. 그는 과학의 중립성이라는 그늘에 숨어서 “나는 다만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선진국들은 이미 과학의 가치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는데도, 영원한 선진국 워너비 대한민국만은 독실하게 과학의 중립성을 신봉하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