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관람객 수가 천만 명을 넘었다. 올해 쏟아져 나온 수많은 TV 사극들이 대부분 큰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에 견주어보면, 그야말로 ‘폭발적 반응’이다. 언론은 흥행의 이유로 ‘대선효과’를 거론한다. 영화가 대선을 앞두고 시의적절하게 바람직한 지도자 상을 묘사했다고 한다. 좋은 지도자를 원하는 마음이 영화 <광해>의 인기에 한 축이었다는 설명. 그런데 이런 설명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 한쪽에 의구심이 든다.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인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좋은 임금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성군을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이 오히려 폭군을 조장하는 게 아닌가.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왕을 조롱하지만 여전히 왕의 장난감에 불과했던 광대가 <광해>에서는 왕좌를 차지하고 가짜 왕이 됐다. 영화 속 가짜 광해는 밤낮으로 ‘대동법(大同法)’을 공부하지만, 그런 것치곤 대동법에 대한 입장은 ‘상식선’에서 정당화된다. 산골 농부에게 전복을 징수하는 미친 세상에서 “땅 열 마지기 가진 자가 쌀 열 섬을 내고, 땅 한 마지기 가진 자가 쌀 한 섬을 내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상식 말이다. 영화는 이 상식을 밑바탕에 두고, 사적 이해득실(self-interest)을 위해 정치를 이용하는 신하들과 이에 저항하며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하는 왕 사이의 대립을 그린다. 이 대립은 단순히 정치적 견해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 선과 악의 문제로 묘사되는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권세를 휘두르는 신하들은 간신(姦臣)으로 악이며, ‘민의(民意)’를 살피고 상식에 부합하는 치세를 펼치는 가짜 광해는 성군(聖君)으로 선인 셈이다.
성군, 바람직한 정치가의 이상?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선과 악의 구분에 비추어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저씨, 아주머니들 말마따나 “순 도둑놈들만 있는 정치판”을 생각하면, 제 잇속만 챙기려는 정치가들(간신)과 싸우는 바람직한 지도자(성군)의 모습에서 감동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감동은 곧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가운데 광해 같은 성군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점에서 광해는 조선과 대한민국이라는 시차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정치 지도자의 미덕을 그리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를 ‘어질고 덕이 뛰어난 임금’이라는 의미에서 성군이라고 표현했다. 유사한 맥락에서 칸트(Kant)는 도덕적 정치가(moral politician)와 정치적 도덕가(political moralist)를 구분하고, 롤스(Rawls) 역시 정치가(stateman)와 정치꾼(politician)을 구분하면서 각각 전자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간단히 말하면, 조선 시대의 성군, 칸트의 도덕적 정치가, 그리고 롤스의 정치가는 모두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성군이 아닌 성실한 일꾼 그러나 성군이라도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왕이라는 점엔 변함이 없다. 모든 것이 왕의 소유이기 때문에, 백성 역시 왕의 소유물이며 지배의 대상에 불과하다. 성군이 아니라면, 굳이 폭군이 아니라 단지 무능한 왕이어도 백성은 불행할 것이다. 그래도 피지배자들에 불과한 백성에겐 민의를 살피고 선정을 베풀어 줄 왕을 바라는 것, 즉 성군을 바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 매번 성군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왕은 성군이었다가 폭군으로 변하기도 한다. 성군이라도 한 사람을 반병신이 되도록 고문할 수 있고, 또 말 한마디로 그를 사면할 수 있다. 이것을 법치(法治)에 반대되는 인치(人治)라고 한다. 인치가 얼마나 자의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정한 것인지, 또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입헌민주주의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과 투쟁의 결과물이다.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법에 따라 통치되는 법치를 쟁취한 것이다. 우리는 통치의 대상인 백성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며,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그가 가진 모든 권력은 원칙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헌법에 명시해 두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성군이 나타나기를 기도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덕목과 자질을 갖춘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또 대통령에게 ‘똑바로 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정치가가 공공선을 추구하고 또 국민의 상식 수준에서 ‘납득’할 수 있는 정치를 수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광해나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 그러니까 우리를 굽어살펴주실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분명히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군이 아니라 ‘성실한 일꾼’이다. 굽어살펴주실 지배자가 아니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지도자가 필요할 뿐이다. 오늘날 과거의 독재자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지난 5년간 현직 대통령이 추진했던 일 중에 우리가 막을 수 있던 게 무엇 하나 있었나? 21세기 대한민국의 폭군은 대통령을 대왕으로 여기는 우리 국민에게서 탄생했다
제왕적 대통령의 탄생 혹자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마치 조선 시대 왕처럼 제한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최장집 교수는 “현실에서 대통령이 설사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가졌다 하더라도 정당과 정치인들에 의해 제도적으로 견제된다면, 그러한 개인적 스타일은 그대로 현실화될 수는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실은 제도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제대로 된 견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지난 5년간 현직 대통령이 추진하고자 했던 일들 가운데, 무엇을 막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누가 이런 상황을 야기했을까? 사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간신배들? 모든 것을 바꾸어주기를 기대하며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을 쥐여준 사람은 누구인가? 국민들, 바로 우리 자신이다. 희망도 대통령에게 걸고, 불만도 대통령을 향해서만 외쳐대는 국민들이다. 민의를 반영한 치세를 펼쳐 달라고, 성군을 바라듯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 국민 말이다. 통일된 민의라는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존재해서도 안 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자신이 민의라고 굳게 믿는 것을 위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최장집 교수가 지적했듯이, “막강한 국가 최고 수반의 권력과 권한이 사인화 및 개인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통령을 잘 뽑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조선 시대 백성이 성군을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고, 성군으로서 박정희를 추억하는 것이나 성군으로서 문재인 혹은 안철수를 바라는 것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가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가 된 것처럼, “이게 다 대통령 때문이다”라는 푸념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겐 도덕적 지배자가 아니라 도덕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성군 타령은 이제 그만. 성실한 일꾼을 뽑을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