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면 흉흉한 소식이 가득하다. 토막 살인, 무차별 칼부림, 이제 인육매매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아동 성폭행과 관련된 뉴스는 하루에 몇 번을 들어도 그때마다 치가 떨린다. 함께 라디오 뉴스를 듣던 택시 기사 아저씨는 연신 “에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열변을 토한다. 감옥에 가둬두기엔 세금이 아깝다고까지 말하는 아저씨, 표현은 격하지만 그 분노는 십분 공감한다. 저런 인간 말종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다. 정부에서 범죄자들을 진짜 찢어 죽이기 시작하면 속이 시원할까?
흉악범에 대한 분노라고 하니 영화 <테이큰>의 리암 니슨이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리암 니슨은 자신의 딸을 납치한 범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딸을 놔준다면 여기서 끝내겠다. 너희를 찾지 않을 것이고. 쫓지도 않을 거다. 허나 아니라면, 널 찾아낼 것이다.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다.” 내가 흉악 범죄의 피해자라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통쾌한 복수극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복수의 핵심은 ‘당한 만큼 갚아주는 것’에 있다. 복수는 법과 범죄의 개념이 없던 시절부터 행해지던 자연스러운 행동 양식이다. 무협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부모님의 원수, 내 칼을 받아라!”는 이러한 복수의 전형이다. 원수를 죽인다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복수라는 행위 자체가 다른 방법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복수는 남의 것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복수는 정말 달콤하다. 하지만 복수에는 몇 가지 심각한 걸림돌이 있으니, 첫째로 복수를 위해서 생업을 포기할 정도로 열심히 칼을 갈아야 하며, 둘째로 그렇게 열심히 칼을 갈아도 복수는커녕 도리어 당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복수가 다시 상대방의 복수로 이어지는 복수의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악순환을 막으려면 상대와 상대의 친구, 친족을 전멸시키는 어마어마한 폭력이 있겠지만, 이것은 정당한 복수의 기본인 비례성에 어긋난다. 뺨을 맞으면 상대 뺨을 때려야지 칼로 찌르면 안 되는 법이다. ‘공정한’복수란 이래저래 어렵다. 근대국가는 그래서 개인적 복수를 법으로 막고, 상대를 대신 처벌해주기 시작했다. 이제 국가가 판결과 처벌의 유일한 주체가 된다. 분노한 리암 니슨은 스스로 복수를 행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행사한 폭력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감내해야만 한다. 국가가 원수를 갚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시간과 노력, 그리고 리스크를 대신해줄 수 있는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를 나누어 부담하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복수해줄 가족이 없어도 상관없고, 원수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상관없다. 내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상대여도 상관없다. C.S.I.가 원수를 찾아 죄목을 낱낱이 밝혀내고, 감옥이 처벌을 대신한다.
거세와 처벌은 우리 사회와 맞지 않다 거세와 처벌 없이도 우리는 그들을 엄중하게 처벌할 수 있다
정의의 구현자로서 국가가 흉악범을 잡아들이고 죄를 묻고 처벌하며, 그 비용과 리스크 역시 공동체가 공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한이 풀릴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다. 그래서 드라마 C.S.I.는 범인의 죄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도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아동 성폭행 사건의 경우에서처럼, 범인이 체포되어 죄가 낱낱이 밝혀졌음에도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경우가 있다. 추측하건대, 죄의 무거움에 비해 처벌이 가벼워 ‘당한 만큼 갚아준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적 복수가 금지된 상황에서 처벌마저 솜방망일 경우, 이 분노가 법체계를 향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는 법체계에 전반에 대한 신뢰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대중의 법 감정을 고려했을 때, 분명 아동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강화돼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폭력을 거부하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하지만,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했듯, 정의는 근본적으로 폭력이라는 수단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순간 그것을 처벌하는 폭력이 개입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법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폭력을 ‘법수호적 폭력’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이런 법수호적 폭력이라도 무작정 긍정되는 건 아니다. 해당 사회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법수호적 폭력은 전체 국민이 동의하는 폭력이기에 한 사회의 인권에 대한 감각의 기준이 된다. 이런 문제에 이렇게까지 반응할 수 있구나 하는 기준 말이다. 죄인을 통째로 불태우던 중세인들은 하층민이나 외부인을 대할 때 훨씬 폭력적이었다. 죄인을 불태우던 그 호전성과 폭력성이 그대로 다른 분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폭력적인 시대였기에 처벌 역시 폭력적이라 할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처벌의 모습과 그 사회 구성원들의 감각은 함께 움직인다.
거세와 사형은 필요 없다 거세는 인체의 일부분을 못 쓰게 만드는 형벌이다.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신체에 변형을 가하는 행동은 현대 사회에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행위다. 사형 역시 목숨을 거두는 궁극적인 행위로 생명 자체를 존중하는 우리들의 기준과 맞지 않다.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처벌의 목적을 ‘교화’에 둔다. 사형은 죄인이 자기 잘못에 대해 반성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거세와 사형을 반대하는 이유는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분노에 공감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 처벌의 수위와 방법이 우리 사회의 정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안 그러면 된다”는 반론을 제기하며 국가가 행하는 폭력이 무조건 강해진다면, 우리들 역시 어느새 그런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