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부동산 개발업자 샘 바실(Sam Bacile)이 제작한 <이슬람교도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란 영화의 예고편이 유튜브를 통해 퍼지면서 이슬람권이 들끓기 시작했다(아랍권이 아니라 이슬람권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아랍은 민족을, 이슬람은 종교를 기준으로 하는 개념이다). 이 영화는 이슬람의 예언자 모하메드를 도둑, 호색한 등으로 비하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데, 실제 예고편을 보면 재미도 감동도 없는 그런 삼류 영상물이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의 순진함>의 예고편이 화제가 되자, 이집트의 ‘이슬람교도 형제단’과 이란 정부가 즉각 성명을 통해 “이 영화가 이슬람에 모욕을 줬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후 이슬람권에서 본격적인 반미 시위가 시작됐는데, 과격 세력의 공격으로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후 이집트 카이로의 미국 대사관도 성난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고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에서도 시위가 확산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시아 지역까지 시위에 가세하면서 바야흐로 ‘전 이슬람권 대(對) 미국의 대결’로 비화되고 말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6일자 기사를 통해 이번 이슬람권의 반미 시위를 ‘자유’에 대한 서방과 이슬람의 가치관 충돌로 해석했다. 미국 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이유로 영화 제작자를 처벌하지 않으려고 하고, 같은 맥락에서 유투브가 해당 동영상에 대한 삭제 권고를 거부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슬람권은 언론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고, 선지자 모독을 형사법으로 처벌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라는 분석이다. 미국과 이슬람권의 대립을 서방과 이슬람의 가치 대립으로 비화시킨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이번 사건을 단순히 ‘종교적 세계관에 경도된 이슬람권이 언론의 자유에 따라 보호되어야 마땅한 영화에 지나치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언론의 자유 VS 이슬람의 믿음? <뉴욕타임스>가 ‘서방의 가치’라고 말한 언론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알다시피, 언론의 자유는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이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미국 법조계는 어떤 이유에서도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못 박고 있는데, 이는 곧 샘 바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특정한 경우, 언론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익히 알고 있기에, 샘 바실의 입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가 공공연히 “이슬람교는 암과 같다”는 말을 지껄이고 다녀도 말이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표현에 대해 또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간에는 개인마다 의견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의견 간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가치다원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가치다원적 현실은 근대의 산물로, “더 이상 가치 간에 위계를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가치가 더 우월한 것인지 알 수 없고 단지 상대적으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이들 가치 간에 양립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자연히 가치들 간의 끝없는 투쟁이 발생한다. 벌린(Isaiah Berlin)은 이 투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가치다원주의’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가치다원성이라는 현실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상대방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왈쩌(Michael Walzer)는 양립 불가능한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관용(toleration)’이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왈쩌는 그의 책 『관용이란 무엇인가』에서 관용이 포기, 무관심, 스토아적인 용인, 호기심, 흥미 등 다양한 형태로 행해질 수 있다고 지적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 테니”와 같은 태도 역시 상대방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가치다원주의에 반대하는 가치는? 그러나 가치다원주의의 의미를 단순히 “너는 너, 나는 나” 식의 태도에 국한해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가치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나의 사상 역시 많은 가치들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때문에 나의 사상을 상대방에게 강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사상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듯이 상대방의 신념 역시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가치다원주의의 핵심이자, 종종 간과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가치다원주의에 반하는 사상을 제시하면서, 이것도 하나의 가치관이니 인정해달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상대방에게 대단히 큰 종교적 의미가 있는 특정 인물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고, 상대방의 종교적 믿음이 대단히 순진한 것이라고 헐뜯는 영화를 만들어 보여주면서 “이것도 다양한 가치 가운데 하나이니,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치다원성을 부정하는 사상을 가치다원주의의 이름으로 관용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논의에 바탕해 이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는 것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둔다. 개인들 스스로 가치관을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것 역시 가치다원주의의 시사점이기 때문이다.

삼류 영화 예고편 때문일까? 어쨌거나, 작금의 사태에 대한 모든 비난의 화살이 일방적으로 이슬람권을 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미국 언론은 이슬람교도들에게 가치다원주의를 인정하라고, <이슬람교도의 순진함>을 관용하라고 종용한다. 말은 안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이 그깟 영화 예고편에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기에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에 대한 미국의 뿌리 깊은 편견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가치다원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는 나라이고, 이슬람교도들은 가치다원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부정한다는 편견 말이다. 그러나 가치다원주의와 언론의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은 오히려 미국 사람들도 매한가지가 아닐는지. 지금 일어나는 갈등의 이유가 단순히 삼류 영화 예고편 때문만은 아니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평소 이슬람교도들을 대하던 미국인들의 비관용적 태도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모든가치는상대적이라는 가치다원주의 그렇다면 상대방의 가치를 부정하는 가치 역시 인정받아야 할까? 그리고 이슬람의 분노는 단지 삼류영화 한 편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