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함포에 당한 사무라이의 일본은 재빨리 서구 기술을 받아들여 제국주의 국가 반열에 올라섰다. 기술은 기술일 뿐 잘만 이용하면 된다고 했다. 기술을 의심했던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영토 욕심이 전쟁을 불렀다. 2차 대전 말 일본은 미국의 핵폭탄에 초토화됐다. 일본은 이번엔 재빨리 핵 기술을 받아들였다. 50개의 핵발전소로 세계 3위, 에너지 선진국이 되었다. 56년이 흐른 어느 날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했다. 일본은 다시 한 번 피폭의 공포에 휩싸였다. 끝없는 죽음에도 거듭 핵을 개발하는 일본. 똑똑한 개그맨 황현희가 말했듯 “왜 그럴까요?”
푸른 하늘 저 멀리 힘차게 날으는 우주 소년 아톰은 일본인의 우상이었다 히로시마를 날려버린 강력한 핵 에너지를 잘만 사용하면 전쟁으로 피폐한 일본을 구원할 거라 생각했다
리틀 보이, 마법과도 같은 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프로펠러 4개가 붙은 폭격기 B-29 한 대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태평양을 부지런히 건너온 폭격기는 도심으로 길이 3미터, 지름 71센티미터의 4톤짜리 쇳덩이를 떨어뜨렸다.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였다. 리틀 보이는 중력가속도에 따라 지표면으로 떨어졌고 폭발이 일어났다. 히로시마는 지옥이 됐다. 폭탄이 떨어진 장소에서 1.2킬로미터 범위 내에 있던 사람의 절반 이상이 그날 안에 사망했고, 6만 채의 집을 포함한 12만 제곱킬로미터 안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방사능 피폭으로 그해 12월까지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히로시마 시 총인구가 34만명 정도였으니 폭탄 하나에 전 인구의 60%가 목숨을 잃은 셈이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전 세계인의 머릿속에 ‘핵’이라는 단어가 강렬히 자리 잡게 되었다. 폭탄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일 수 있는 무기라니, 말 그대로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존재였다. 특히 피해 당사자인 일본인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20세기 초는 제국주의의 시대인 동시에 과학의 시대였다. 이성과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지배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1853년 서양 함포의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했던 일본이었지만, 이러한 과학에 대한 믿음으로 삽시간에 서구를 쫓아갔고,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또다시 어찌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했다. 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대체 저건 뭘로 만든 것인가?” “사람들은 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힘.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핵폭탄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상징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55년 7월에 영국의 철학자 러셀(Russell, B. A. W.)과 아인슈타인(Einstein, A.)은 전 세계 강대국 대표에게 핵무기에 의한 인류 멸망 위기를 경고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보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지성인들이 핵 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아톰, 잿더미로부터 날아오르다 다른 한편에서는 핵을 무기가 아닌 평화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현실화되고 있었다. 1954년 소련의 오브닌스크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에서 최초로 전기가 생산됐고, 56년엔 영국의 칼더 홀 원자력 발전소가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핵의 평화적 이용 분위기 속에, 55년 12월 31일자 도쿄신문(東京新聞)에 이런 글이 실린다. “산타마(三多摩) 산중에 새로운 불이 타고 있다. 공장과 가정으로 많은 전기를 보낸다. 그런데 이러한 원자력을 잠재 전력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석탄 등의 자원이 지구상에서 차차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에너지가 갖는 위력은 인류 생존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피폭으로부터 불과 10년 만에 핵으로 전기를 생산하자는 이야기가 공론화된 것이다. 핵이라면 누구보다 공포스러워야 할 일본인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대중문화는 대중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1952년부터 연재된 데즈카 오사무의 <우주소년 아톰>은 핵 기술에 대한 자세 변화를 볼 수 있는 문화 콘텐츠다. 리틀 보이라는 이름의 핵폭탄이 남겨놓은 잿더미에서 ‘원자(atom)’라는 이름의 소년 로봇이 날아오른 것은 ‘일본의 재건’에 있어 상징적 사건이다. (심지어 아톰의 여동생 이름은 우라늄을 의미하는 ‘우란’이다). 아톰은 본래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텐마(天馬) 박사가 아들의 모습을 본떠 만든 로봇이지만, 성장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버려지고 후에 오챠노미즈(お茶の水) 박사의 손에 거둬들여지면서 ‘인간’으로 성장해간다. 아톰의 스토리는 핵에 대한 당시 일본의 인식 변화를 상징하는 셈이다.*
낙관주의와 욕망이 춤추는 무도회장 애초에 핵무기를 폐기하자는 주장과 핵으로 발전하자는 주장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과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라는 생각이 일반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치 중립성으로부터 ‘악용하지 않으면(핵무기가 아니면) 평화적 이용은(핵 발전은) 괜찮다’라는 식의 낙관주의가 싹트게 된다. 이러한 낙관주의의 이면에는 ‘비록 우리를 파괴한 것이지만, 그 엄청난 힘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핵무기를 꿈꾸는 북한, 핵 발전에 의존하는 일본과 한국 모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게 핵 발전소가 수단에 불과하듯 북한에게는 핵무기도 그저 수단일 따름이다. 녹색연합은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1주기 성명에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통해 핵 발전소가 결코 평화적인 에너지가 아님을, 생명과 미래를 한순간에 죽일 수 있는 핵무기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였다”고 지적한다. 반면 최근의 핵안보정상회의에서는 “원자력 시설의 방호와 방사능 비상사태 대응에 있어 핵안보와 원자력 안전 측면의 통합적인 고려”라는 두루뭉술한 내용의 ‘서울 코뮈니케’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TV에 나오는 각국 정상들의 모임은 마치 낙관주의와 욕망이 불안하게 춤추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1979년 3월 28일, 1986년 4월 26일, 그리고 2011년 3월 11일. 핵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날짜다. 기술 낙관주의가 비극적 현실을 낳은 날들이기도 하다. 피폭은 70여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43년 전, 26년 전, 그리고 1년 전의 일이다. 후쿠시마 사태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인 동시에, 기술과 과학에 대한 낙관주의와 욕망이 만들어 낸 인재이기도 하다.
덧붙임 데즈카 오사무가 핵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만화를 그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아톰의 눈물』이라는 에세이집에서 “나는 자연과 인간성을 외면한 채 오직 진보만을 추구하며 질주하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알마나 깊은 균열과 왜곡을 가져오고 얼마나 많은 차별을 낳는지, 또 인간과 모든 생명에게 얼마나 무참한 상흔을 남기는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톰은 하늘을 날고, 엉덩이에서 기관총이 나오고, 60개 국어를 구사하는 것 외에 선한 사람을 돕는 착한 로봇이다. 안타깝게도 핵이 사방에 널려 있는 현실 세계에선 아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인류의 슬픔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