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화된 소설 『헝거 게임(Hunger Games)』은 폐허가 된 가상의 독재국가‘판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잔혹 동화다. 판엠은 수도 ‘캐피톨’과 12개의 주변 구역으로 나뉘는데, 주변 구역을 착취해온 수도 캐피톨의 귀족들에 맞서 주변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판엠의 왕은 또 다른 반란의 싹을 짓밟기 위한 수단으로‘헝거 게임’을 활용한다. 해마다 12개 구역에서 각기 두 명씩의 십 대 소년 소녀를 추첨으로 뽑은 후,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 모두 게임에만 신경 쓸 경우 살아날 확률은 24분의 1. 동시에 판엠이 권력을 누릴 확률은 100%. 경쟁에서 결과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딴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떡밥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이다.

1) 모든 과정은 24시간 리얼리티 TV로 생중계된다. 2) 시청자들은 마음에 드는 소년이나 소녀에게 돈을 걸 수 있다. 3)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경기는 계속된다. 헝거 게임의 설정은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헝거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머지 23명이 죽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게임 참가자들은 실력을 키우거나, 스폰서를 구하거나,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체력과 지능, 심지어 외모까지 중요하다(미소녀가 유리하다). 게임 주최 측은 게임 시작 전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모든 참가자에게 훈련도 시켜주고, 스폰서를 구할 기회도 준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승리를 보장하진 못한다. 승리의 가장 주요 요소는 다름 아닌 ‘운’이다.

확률의 신이 당신 편이기를 “확률의 신이 언제나 당신 편이기를…” 영화 전체에 반복되는 이 축복 기원(?)은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잘 알려준다. 사람들은 매년 헝거 게임의 참가자로 뽑히지 않을 확률, 경기를 잘 치러낼 수 있을 만한 재능을 발견할 확률,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숨죽이고 기도한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잔혹한 게임이지만, 그 안에서 공정한 규칙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게임 바깥의 규칙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캐피톨의 왕과 귀족들은 목숨을 건 게임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고 헝거 게임의 우승자들이 누릴 수 없는 호사를 ‘그냥’ 누린다. 12개 구역을 끊임없이 착취하면서도 그들 중 일부를 잔혹한 살육의 콜로세움으로 밀어 넣고 도박을 즐길 수 있다. 소수가 다수의 목숨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즐기는 ‘게임 바깥의 세상’에는 공정한 규칙도 희망도 없다. 자식이나 동생, 혹은 친구가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에 참가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확률의 신에게 기도하거나 침묵하는 것밖에 없다. 헝거 게임의 참가자로 자원한 주인공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단 한 명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12번 구역의 주민들에게 영원한 명예로 남을 일이다. (…) 처벌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과감한 이의(異意) 표현, 즉 침묵으로 모두가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무대 위에서 선 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고 외치는 침묵.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고 외치는 침묵.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외치는 침묵.”그나마 침묵은 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저항수단이었던 셈이다. 강요된 규칙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저항으로서는 의미 있는 행동일지 몰라도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침묵하는 자들이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확률, 즉 판엠의 왕과 귀족들에게 대항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모르긴 몰라도 헝거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24분의 1 보다 훨씬 작을 것이다. 차라리 ‘나는 뽑히지 않을 거야’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게임 안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던져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게임 바깥의 절망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침묵이야말로 왕과 귀족들이 12개 구역에 허락한 유일한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이 게임이 반란을 막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24명 중 1명밖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헝거 게임의 규칙 ‘나’만은 살 수 있을 거라는 거짓 희망이 잔인한 게임을 유지한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는 헝거 게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된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된 그 게임 안에서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진다. (아직 영화나 책을 보지 않았을 독자를 위해, 헝거 게임의 규칙을 바꾼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비록 왕과 귀족이 정해놓은 게임 속에서라도 한 사람의 ‘다른’ 행동이 상대방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결국 게임의 규칙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이 게임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 역시 그 뒷이야기를 읽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침묵으로 일관하던 12개 구역의 주민들이 이제 게임 바깥의 규칙을 바꾸려할 것이다. 『헝거 게임』의 외형적 설정은 중세시대 전제왕정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이야기 속 시점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생존경쟁’이라는 틀 속에서 온갖 노력을 다해보지만 결국에는 ‘운’에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게임의 규칙, 경쟁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그 규칙 위에 군림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감히 저항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 속 청년들의 생존경쟁에 대한 공포가 영화 주인공의 그것보다 덜하지는 않다. 『헝거 게임』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그 절망적 침묵이 우리 세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확률의 신을 버린다는 것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변화는 가능하다. 게다가 우리는 영화 속 판엠과 달리 형식상이나마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 ‘종이 돌멩이(paper stone)’이라 불리는 투표를 통해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변화를 이끌어낼 시작점. 즉 확률의 신을 버리는 행위다. 최대한 노력하다보면 적어도 나는 잘되지 않을까, 하는 그 긍정적인 마인드를 버리라는 말이다. 온갖 기업 광고와 자기계발서, 인생 멘토가 외치는 희망과 긍정에 물음표를 다는 것이 게임의 룰을 바꾸는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