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삼일절, 3월 3일 납세자의 날, 3월 3일 삼겹살데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3월 14일 화이트데이, 3월 21일 암예방의 날, 3월 22일 세계 물의 날, 3월 23일 세계 기상의 날, 3월 24일 세계 결핵의 날 등. 3월엔 무슨무슨 날도 많다. 그런데 꽃피는 3월에 기념해야 할 것이 독립운동, 납세, 양돈농가, 여성, 암, 물 부족, 기상, 결핵이라니, 하나같이 뒤에 ‘문제’라는 단어가 붙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주제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중 유일하게 챙기는 날은 단 하루 화이트데이, 사랑의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다. 하지만 화이트데이는 오래전부터 상업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밸런타인데이야 성발렌타인을 끌어들여 의미를 부여한다 치더라도 화이트데이는 일개 일본 제과회사에서 만들어낸 데이마케팅(Day Marketing)의 산물일 뿐이라며 말이다. 1992~3년도에는 YMCA 주도로 ‘상업주의에 물든 밸런타인데이를 퇴출시키자’며 주요 백화점, 상가 등을 돌아다니면서 초콜릿이나 사탕을 팔지 말아 달라는 운동을 한 적이 있는데, 실제 몇몇 업체로부터 동참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냈지만 정작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나 역시 때마다 초콜릿과 사탕을 교환하는 것은 상업주의에 놀아나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심리적 압박감은 피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면전에 대고 ‘이건 상업주의에 놀아나는 꼴이니 너에게 사탕을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세계 여성의 날, 세계 물의 날은 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까 기념일을 기념할만하게 만드는 운영의 묘가 필요해

초콜릿이 필요한 시간 그러다 떠오른 생각,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는 데이마케팅의 결과가 아닌 원인이지 않을까. 즉 기업들의 꼬임새에 사람들이 넘어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열망에 기업들이 편승한 정도가 아닐까. All you need is love란 비틀즈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에 대한 사람의 열망은 대단하다. 사귀지 않지만 상대를 사랑하기 시작한 경우 이런 행사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위장해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이미 사귀는 사이일 경우 평소 못다 했던 사랑을 다시 한 번 드러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현대의 수많은 날 중에 뚜렷이 기억되는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어린이날, 어버이날, 크리스마스 등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사랑이 고픈 세상에 살고 있는지, 또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이것이 상업주의보다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다. 괴롭고 피곤한 우리에겐 사랑을 표현할 여유가 없고, 해서 점차 무엇으로 어떻게 마음을 전해야 하는지 그 방법조차 잊어가고 있다. 억지로라도 날을 정해놓고 기념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돌아보고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서로에게 미움이나 증오, 슬픔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기념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한 줌의 초콜릿과 사탕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니, 좋지 아니한가? 그 시작이 어떠했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날로 정해놓고 ‘자발적으로’ 기념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이제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단순히 상업주의로 치부하며 폄하하기는 어려운 시점이다. 냉동실 한구석을 차지하게 될 사탕 한 바구니보다는 좀 더 실용적인 선물로 대체하거나 초콜릿이나 사탕의 무게에 비추어 상대방의 사랑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면 상업주의라는 비난은 간단히 회피할 수 있다. 다만 상업주의가 슬픈 것은 사랑을 표현하자고 정해놓은 그날에도 초콜릿과 사탕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세계 물의 날은 왜 인기가 없는가 그렇다면 왜 삼일절은, 세계 여성의 날은, 세계 물의 날은 왜 화이트데이만큼의 충성도나 참여율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력에 새겨진 기념일의 대부분이 무겁고 심각한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표현할 시간도 부족한 이런 세상에서 독립운동, 납세, 양돈농가, 여성, 수학, 암, 물 부족, 기상, 결핵을 기념하라니, 가능할 리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사람들이 상업주의에 물들어서 정작 중요한 삼일절은 놀러 가는 날 정도로 취급하고 화이트데이만 챙긴다’고 비난한다. 글쎄, 그렇게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의미 있는 날이 아무 의미 없는 날처럼 여겨지는지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주요 기념일들을 사랑의 문제로, 개인사의 영역으로까지 끌어내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달력에 인쇄되어 있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생일, 연인과의 100일, 1주년 등은 엄청나게 높은 충성도와 참여율을 보인다. 반대로 달력에 새겨진 그 많은 기념일을 챙기는 경우는 드물다. 그중에 나를 위한 기념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처럼 개인적으로 뚜렷한 대상이 있는 기념일은 삼일절, 개천절, 광복절 등에 비해 훨씬 큰 참여율을 보이는데, 무엇인가 기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의미 있는 기념일이 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것을 기념할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기념일을 관심 있게 만드는 법 삼일절도 본질적으로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날이다. 다만 방법을 모를 뿐이다. 마냥 무겁고 심각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알랭 드 보통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도는 “태도와 행동의 발전과 영속을 통해서 발휘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제도를 통해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기업들은 데이마케팅을 통해 자신들의 기획이 조금이나마 제도화될 수 있도록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붇는다. 반면에, 정부 및 관련 부처들은 기업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제도화 수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극히 미미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 능력을 활용하지는 못할망정, 사람들의 저조한 참여율에 낙담하고 오히려 한글날과 제헌절같이 반드시 챙겨야 할 주요 기념일조차 공휴일을 해제하는 실정이니, 답답한 일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기념일을 ‘나’의 기념일로 만들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리부터 시작해보자.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누군가에게 빵과 장미를 선물하는 거다. 여자친구, 누나, 여동생, 엄마, 아니면 학교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도 좋다. 혹시 아는가, 당신의 작은 행동이 또 하나의 ‘사랑을 표현하는 날’을 탄생시킬지?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사랑을 전하는 기념일은 많을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