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완득이>에서 싸움짱 도완득과 동주 선생은 ‘폭력적인’ 관계다. 동주 선생은 밤낮으로 트집을 잡고 분노한 완득이는 선생님을 두들겨 패겠다며 따라다닌다. ‘학생이 선생 때려. 실추된 교권’ 따위의 기사 제목이라도 뜰 판이지만 530만명이 지켜봤듯 그 관계엔 오히려 따뜻함이 가득하다. 요즘 학교폭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웹툰마저 감시하는철저한 관리 시스템으로 폭력을 없애겠다지만, 폭력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 학교폭력에서의 문제는 폭력 자체가 아닌 상대를 대하는 마음이다. 도완득의 주먹질과 일진 오빠의 잔혹한 터치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갈취하고, 고문하는 학교의 일진은 사실 이 땅의 우등생이다. 서열을 부추기고, 연대감을 제거하는 시스템이 일진을 키워낸다.

사전을 보면 폭력(暴力)은 ‘신체적인 손상을 가져오고, 정신적·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정의된다. 치고 패고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상처를 주는 것도 폭력이다. 경제적 약자에 대한 무시, 예를 들어, 손님이 음식점 여직원에게 “내가 힘들게 밸을 눌러야겠어? 여기 서비스가 엉망이네”라고 고함치면 손찌검이 없어도 충분히 폭력적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관계할 땐 항상 폭력이 끼어든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양이를 만났다 치자. 자신과 다른 존재임을 인지한 아이는 도망치거나 손을 뻗는다. 손으로 세게 붙잡아 고양이가 아파할 수도 있고, 놀란 고양이가 먼저 도망갈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연애 중이라면 사소한 행동이 상대에게 아프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걸 쉽게 알 것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인간이 태어나고 입고 먹고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을 내민 그 순간은 두 존재 간에 유대감이 형성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손을 뻗어야 상대도 나를 인지하고 반응을 시작하니까.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트는 건은 이렇게 폭력과 유대가 함께 벌어지는 일이다. 두 존재는 서로가 끼치는 폭력의 정도와 의도에 따라 유대감을 형성할 수도 있고, 배타심을 키울 수도 있다. 다행히 보통은 폭력의 정도보다 의도가 중요하다. 의도가 좋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감이 형성되지만, 의도가 나쁘면 작은 물리력도 심각한 폭력으로 다가온다. 형제끼리의 쌈박질과 회사 상사의 손찌검이 다른 것은 마찬가지 이유다.

관계 맺음은 곧 폭력 학교라는 좁은 공간에 혈기왕성한 어린 친구들을 가득 모았는데 물리적 폭력이 전혀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은 원래 부딪히고 배우면서 폭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기 마련이다. 관계 형성 과정에서 폭력이 불가피하다면, 무조건 억누르기보다 그것을 잘 사용하게 유도함으로써 유대감의 형성을 도와줄 수 있다. 불량했던 청소년들이 함께 농구를 하면서 친구가 되는 만화 『슬램덩크』의 이야기는 그 전형이다. 『슬램덩크』에서 처음엔 거의 깡패 수준으로 나오던 강백호, 정대만, 송태섭 등은 감독님의 따뜻한 손길, 농구라는 열정적 스포츠, 그 안에서 생겨나는 팀워크를 통해 멋진 인격체로 거듭난다. 학교 역시 슬램덩크 속 농구팀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교육받으면서 자신의 폭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동료를 만나고,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 공교육의 근본적 목표 역시 이 유대감을 배양하는 데 있다. 이 관점에서 학교와 폭력은 본래 떼려야 뗄 수 없다. 예전에는 폭력을 다스리는 데 폭력을 사용했다. 교사는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폭력의 독점자로서 전제군주와 같은 역할을 했고, 모든 학생은 그 폭력 앞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교사가 학교폭력의 주체였던 셈이다. ‘지도 편달’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이 압도적 폭력 앞에 학생들 간의 유대는 강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폭력의 의도에 대한 상호 이해가 형성되면 교사와 학생 간의 유대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 선생님 참 우릴 많이 때렸지. 그래도 우리를 위해주시는 선생님이었어.” 완득이와 동주 선생의 관계가 그렇듯.

유대감의 상실, 세상은 원래 정글이잖아 언론은 일진이란 무시무시한 존재를 밝혀냈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일진 발견 사태’는 교사의 절대적 폭력에 가려져 있던 학생들 간의 위계 관계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심하지만 않다면 이것 역시 친구를 사귀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본질적인 문제는 학교폭력의 외형이 아니라 이면에 깔린 생각이다. 최근 학교폭력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최대 문제점은 유대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화해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 만화나 게임보다 훨씬 잔인하다. 상대방을 파괴하고 자기 이익을 최대한 뽑아내려다 보니 폭력의 의도는 사악하고 정도도 과격하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학교폭력엔 사회진화론의 이념이 숨어 있다. “걔는 찌질하잖아요. 제가 때릴 수 있잖아요.” “그렇게 까부는 애를 놔두면 제가 OO 취급받아요.” 언론이 잡아낸 일진 아이들의 목소리다. 이들이 왕따를 괴롭히는 모습은 마치 계급사회에서 귀족이 천민을 대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귀족은 불가촉천민을 함부로 대하지만 연민을 느끼지 않고, 나머지는 그 광경에 관여하지 않다. ‘무서워서’라기보다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계급’의 무게로 피해 학생을 짓누른다. 계급은 누구의 힘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진다. 사회진화론적인 인식이 퍼져있는 이상 물리적 폭력을 강제로 막아도 약자를 향한 공격은 어떻게든 이뤄진다.

일진은 이 땅의 우등생 입시 위주 교육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를 키워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료로서의 유대감을 키워나가야 할 학생들의 머릿속에 철저한 위계와 차별이 당연하다는 듯 작동한다.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 회장님이 맷값 주겠다며 직원을 매질하는 어른들 세상 자체가 문제다. 빨리 높은 자리를 꿰차고 아랫사람이 올라오지 못하게 짓밟는 질서에서 일진은 오히려 모범적인 ‘우등생’일는지도 모른다. 학교폭력은 일진의 손발을 묶는 게 아닌, 학생들에게 서로 싸우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유대감을 심어주는 일이다. 도완득에게 동주 선생이 그랬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