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지구멸망의 해가 밝았다. 새해는 헛된 희망이라도 가져보기 마련인데, 요즘 분위기에는 희망을 갖는다는 말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운석 충돌이나 외계인 침공으로 실제 멸망이 닥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 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위기의식’은 팽배하다. 얼마나 큰 위기인지, 평소 그렇게 긍정적이시던 대통령의 신년사도 ‘어렵다’는 말로 가득하고, 집권여당은 ‘비상대책 위원회’(이하 ‘비대위’)까지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꼼수다’나 ‘민주통합당’도 일종의 비대위인 셈이다.
급박하고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대응 방식은 비대위 소집이다.즉, 정상적인 시스템을 통해 비상상황을 극복하는 시스템인데. 실제로는 언제 어디로 소집할 것인지, 누가 포함될 것인지, 연락은 누가 돌릴 것인지 고려 사항이 너무 많아서 ‘비대위 소집을 위한 비대위’를 만들어야 판이다.(지금 한나당 비대위가 거의 이런 지경이다) 시스템이 잘 구축된 곳에서는 비상시를 대비한 계획 역시 시스템의 일부, 즉 매뉴얼의 형태로 미리 마련해 둔다. 매뉴얼은 비상상황을 몇 가지로 가정한 다음에 경우에 맞춰 각각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지가 명시돼 있어, 실제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개인은 그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이다.
야, 안 돼~ 10분? 그런데 매뉴얼의 절차가 강조되다보면 이것이 과연 실제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개그콘서트의 비상대책위원회 코너는 이 같은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김원효(경찰청장 역)는 사건만 터지면 매번 “야, 안돼~ 생각을 해봐 10분? 10분 안에 언제 어디서 그걸 해결하느냐? 그건 뭐 내 맘대로 되는 줄 아냐? 안 된다니까?!”라고 말한다. 테러범과 협상하기 위해 10억을 마련할 때에도 은행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신분증을 주고 체크된 곳에 사인을 수십 번하고, 비밀번호 누르고 돈 세고 하는 사이에 시간이 다 흘러간다. 그 급박한 상황에도 대통령이 등장하면 거수경례 다 하고, 덕담 주고받고, 국민의례에 공연까지 한다. 규정과 절차에 따라 비상대책을 세우기 위해 소집된 그 집단이 그 규정과 절차 때문에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 상황극을 지켜보면서 웃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웃지 못할 상황이 된다. 영화 ‘도가니’에서 아이들을 구해 달라는 비명에 가까운 절규에도 “저희 담당 업무가 아니라서요”라고 말하는 공무원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천안함과 연평도에서 젊은 장병들이 죽어가는 비상상황에 책상머리에 앉아서 입으로만 ‘되네, 안 되네’를 따지는 고위 관료들의 모습에서 비상 사태도, 대책도 찾기란 힘들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실제 비대위를 소집할 정도의 위기는 매뉴얼대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지금 당장 그 산을 불태우면 될 것 아니야! 개그콘서트의 또 다른 코너인 ‘감수성’에서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위기에 대처한다. 역모를 꾸민 군사들이 산속에 숨어 감수성으로 접근해 오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김준호(왕 역)는 “지금 당장 그 산을 불태우면 될 것 아니야!”라고 소리친다. 왕이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결정하며, 또 즉각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비대위에서처럼 규정과 절차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간첩은 그대로 사형에 처하라,고 외치다가도 왠지 불쌍해지면 그냥 풀어주기도 한다. 비대위에서 절대 해결하지 못할 문제도 감수성에서는 10분 안에 해결된다. 감성적이고 신속한 전근대적 문제 해결 방식은 현대 한국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국회는 항상 뒤늦게 특별법, 특별위원회 등으로 일을 해결하려 들고, 대통령은 국가적, 세계적 위기를 언급하며 초법적인 권한을 휘두르며 국정을 운영한다. 정권에 맞서는 이들도 절차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을 향해서 문제를 해결해 내라고 소리 지른다. 절차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자의적인 판단과 즉각적인 권력 행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독재자 김준호가 밉지 않은 이유 절차와 규정을 따지며 해야 할 일도 안 된다고 하는 쪽과,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더라도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쪽 중 어느 한 쪽이 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 두 가지가 오랜 시간 공존하고 있다. 원리원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필요할 경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두 속성 간의 균형점을 체득한 경우다. 그 균형의 핵심은 다시 개그콘서트의 ‘감수성(感受性)’에 있다고 생각한다. 감수성의 왕, 김준호는 실패한 부하나 오랑캐라도 그 마음에 상처를 주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가 독재자임에도 밉지 않은 것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타고난 공감 덕이다. 2012년 만약 진짜 위기가 온다면, 인류를 구하는 것은 세계 구출 비대위 따위가 아닌 사람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 + + + + 책 ‘정치저작선’ – 막스 베버(Max Weber) 투표의 계절이 다가온다. 위기의 시대, 당신이 선택한 비상대책위원회의 구성원은 누구인가? 그전에, 막스 베버 ‘정치저작선’ 중 ‘제2장. 관료 지배와 정치적 리더십’부분은 꼭 한번 읽어보자.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제이지만, 사실 오래된 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경우도 많다.
+ + + + + 책 ‘완득이’ – 김려령 청소년 권장도서다. 뻔하다면 뻔하고, 유치하다면 유치하다. 읽다가 닭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읽고 눈물이 날 뻔했다면 당신은 합격. 내가 말하는 감수성은 이렇게 뻔하고 유치한 거다. 그런데 ‘중요한 일’ 하시는 분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덕목이다. 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