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후레쉬맨, 배트맨. 악에 대항해 싸우는 영웅을 다룬 영화들은 항상 악의 패망을 끝으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누가 악이니 선이니 하는 관념을 잠시 거두고 내용을 보면, 누구나 악당에 대해 측은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거대한 계획, 정교한 작전, 엄청난 수의 인력 등 나름 열과 성을 다해 세계 정복을 준비하지만 원래부터 월등한 능력자인 영웅들에게 박살 난다. 그렇게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세계 정복의 꿈은 버리지 못한다.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악당들은 머릿수와 노력으로, 오늘도 악당들은 하루를 보낸다.

노동집약적이라고 하면, 정의의 편보다 특히 악한 쪽이 정도가 심하다. 한때 한일 양국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특촬물 ‘후레쉬맨’. 제목은 후레쉬맨인데 악당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악당들은 정의의 편처럼 소수 정예 엘리트 집단이 아니기에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머릿수가 많고, 게다가 악한 일을 한답시고 모인 집단이다 보니 통제도 어렵다. ‘마왕’이 정점에 서고 그 아래로 중간 보스, 일반 병사들이 피라미드 형태의 위계질서를 떠받치는데, 목적이 악하다는 점만 빼면 사실 일반 관료 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임원진을 정점으로, 중간 간부, 평사원이 불철주야 세계 정복을 위해 노력하는 회사, ‘주식회사 세계 정복’쯤 되겠다.

악당들의 적자 경영 세계 정복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회사는 항상 적자에 허덕인다. 비밀 기지를 건설하고 관리, 운영하는 데만도 상당한 돈이 들어간다. 매주 괴수 연구개발비가 들어가는데 회가 거듭될수록 더 강한 괴수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적자 폭도 커진다. 워낙 규모가 큰 집단이다 보니 월급 주기도 벅찰 터라, 어쩌면 마왕은 평소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출연 빈도가 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영광을 담보로 현재 직원들의 희생을 대출한 셈인데, ‘혹시 세계 정복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빚더미처럼 불어날 때면 되레 부하들한테 역정을 낸다. 목표는 세계 정복인데 실적이 없으니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왕이나 간부나 매한가지다. 박사는 매주 새로운 괴수를 만드느라 밥 먹을 틈도 없다. 이 때문에 간부들은 대부분 독신이거나 기러기 부모다. 단시일 내에 성과를 기대하는 경향 때문에 매주 울며 겨자 먹기로 새로운 괴수를 만들어 낸다. 그게 제대로 된 괴수일 리 없고, 성과가 있을 리도 없다. 매주 실패할 때면 못난 자신을 탓하지만, 다음엔 진짜 잘할 수 있을 거야 다짐하며 눈물을 집어삼킨다. 악당들에게 실패는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노동집약형 세계 정복 개중에 제일 힘든 건 평사원이다. 특별한 능력도 없어서 매번 한 뭉텅이로 인식된다. 스타워즈의 쫄병 스톰 트루퍼스는 오열 종대만 잘 맞추지 총만 쏘면 픽픽 쓰러진다. 흰색 갑옷은 어떤 기능이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 후레시맨의 ‘개미군단’은 무섭게 등장해 꼬마들을 괴롭히다가 고민에 빠진다. ‘지금 내가 어린애를 괴롭히는 거랑 세계 정복이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마왕이 시키니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의 눈망울에서 오랫동안 못 만난 자식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악이라고 부르지만, 안을 자세히 보면 누구보다 평범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마왕은 매주 부하들의 아이디어를 귀담아듣고, 질리지도 않는지 또 한 번 기회를 준다. 생김새나 성격, 학연지연, 배경도 안 따지고 실력만 보는 경영철학도 확고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박사는 그래도 항상 “움화화화 이번에야말로…”라고 말하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개미군단은 매번 얻어터지면서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달려든다. 속으로는 ‘아마 우린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음에 두…두고보자!”라고 말한다.

99대 1의 세상과 닮았을까 그 돈과 인원으로 다른 사업이라도 했으면 지금보다야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세계 정복 그게 뭐라고 다들 눈물 나게 고생이다. 그냥 지금 체제에 만족하고 살면 편할 텐데, 자기들보다 훨씬 뛰어난 정의의 편은 자기 기분 내킬 때 등장해 현상유지(status quo)하는 것만으로 박수를 받는데.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왕의 카리스마적 지배(charismatische Herrschaft)에 이끌려 능력도 이름도 없으면서 변화를 위해 몸 사리지 않고 묵묵히 악에 봉사하는 그들이다. 희망 고문도 정도가 있지, 이쯤 가면 주식회사가 아니라 자원봉사단 수준이다. 타고난 능력에, 잘생긴 외모에, 지금 상태를 고수하는 것에 만족하는 정의의 편과 타고난 무능력에, 못생긴 외모에, 그래도 세상을 바꿔보려고 발버둥치는 악의 편.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데다 진즉에 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주식회사 세계 정복은 그들의 세상을 꿈꾸며 오늘도 정의의 편에 맞선다. 99% 대 1% 어쩌고 하는 요즘 이야기랑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글쎄,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저기 잘난 척하는 영웅들의 머리통을 때려주고 싶지 않나? 능력도 이름도 평범하다고?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합격이야. 어때 당신, 악의 편이 되어보지 않겠나?

+ + + + + 책. ‘세계 정복은 가능한가’ 오카다 토시오 지음. 레진 옮김, 파란미디어 펴냄 세계 정복을 꿈꾸는 당신을 위한 지침서!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런 명언을 남긴다. “지금 현재의 ‘행복’과 ‘평화’에 No라고 말하는 것. 새로운 ‘행복’과 ‘평화’를 세계에 선언하는 것. 그것이 새 시대의 세계 정복을 향한 구호인 것입니다.”

+ + + + + 만화. ‘출동!! 먹통 X’ 고병규 지음, 대원씨아이 펴냄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고, 온 지구가 전력을 다해 만들어 낸 ‘먹통 X’ 로봇이 출동한다. 그런데 먼저 출동한 구형 탱크와 전투기가 외계인을 물리치자 먹통 X는 오히려 탱크와 전투기를 공격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아주 많이 생각하고 봐도 재미있는 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