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이 한창이던 1982년 한국에 부루마블이 등장했다. 1934년 미국에서 발매된 모노폴리(Monopoly)와 비슷한 부동산 게임이지만, 푸른 지구(Blue Marble)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 스케일이 남달랐다. 80년대 부루마블을 가진 아이가 자연스럽게 모임의 중심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명절날 어르신들이 화투장을 만질 즈음이면, 아이들은 씨앗 은행에서 발행한 부루마블 화폐를 만졌었다. 꼭 서울과 뉴욕을 사고 말겠다며 호기롭게 말했던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집 한 칸 사겠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 돼버렸다.
게임은 은행이 각 플레이어에게 동일한 금액의 무담보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사실 무상 증여에 가깝다). 게임 전반부는 말을 움직여 각 국가의 수도(정확히는 수도의 주권 증서)를 사는 것이다. 게임판은 아시아-유럽-미주 등 지역별로 구분돼 있는데, 소위 ‘잘사는 나라’는 땅값이 비싸다. 생각해보면 게임판 위 수도의 배치 순서와 가격에는 부루마블 제작 당시 외국에 대한 한국 사람의 평균적 인식이 반영돼 있다. 예외적으로 서울과 제주도가 가장 좋은 땅으로 설정돼 있는 것 역시 한국적 인식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 그나마 서울과 제주도에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수익을 올리게 해준 건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게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씨앗사의 센스라고 하겠다.
유럽이 가장 비싸고, 동남아는 저렴해 주권 증서를 사는 순간, 그 플레이어는 그 땅의 주인이 되어 배타적 권리를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주사위를 굴릴 때마다 서부개척시대마냥 땅의 주인이 생기고, 그 순간부터 방문자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조금 가혹하지만 이런 면에서만 보면 부루마블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시키고자하는 지배의 욕망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촌놈들의 제국주의’ 게임인 셈이다. 일종의 제로섬 방식으로 상대방을 파산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므로 공동 점유나 무상 방문 따위는 당연히 허용되지 않으며, 빌딩이고 호텔이고 주인 마음대로 지어놓고 들르기만 하면 돈을 내야 한다. 플레이어가 몇 바퀴 세계를 돌고나면 주인 없는 땅이 별로 없기 때문에 지출은 불가피하다. 이 소비 지향적인 세계여행에서 승리하는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최대한 적은 수의 땅만 돌아다니는 것이다. 한번 소유권이 정해진 땅은 그 땅의 주인이 파산 직전까지 몰려야 비로소 소유권이 이전될 수 있다. 땅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게임이 기운다. 돈이 없으면 땅을 팔고, 땅을 팔면 역전의 가능성은 낮아진다. 반대로 승자는 돈으로 영토를 넓혀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이에 바탕해 수익을 얻는다. 수익은 그대로 상대방을 파산시켜 굴복시키는 데 사용된다.
그래도 게임은 공정한 편 이처럼 비정한 게임이 왜 재미있는 걸까? 제국주의의 열망이 내 안에도 불타고 있는 걸까? 결국엔 운 좋고 돈 많은 사람이 승리할 뿐.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런 것만으로도 지겨운데 왜 이런 게임을 하는 걸까? 그건 이 게임이 정의롭게 행해지기 때문이다. 비록 게임이 노력이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규칙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정의롭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게임의 진행 과정에서 누구는 주사위를 3개 굴린다든가 누구는 벌금을 안 내거나 하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동일한 규칙에 따라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설사 99%의 운과 1%의 전략으로 승패가 갈리더라도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정의로운 상황으로부터 정의로운 단계를 거쳐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로 정의롭다’는 노직(Robert Nozick)의 가정을 적용해 해석해보자. 부루마불 안에서 이 가정이 완전하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게임의 진행뿐만 아니라 게임의 조건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 시작 시점의 조건이 동일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사위를 던질 기회를 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기는 200만원을 가지고 누구에게는 50만원만 쥐어주면 아무도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부루마블의 모든 플레이어는 동일한 금액을 갖고 아무도 선점하지 않은 땅을 향해 동일한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게임의 결과가 정의로울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모두에게 동일한 ‘게임의 룰’이 적용되기에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실패는 노력, 재능, 운의 문제라고 말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적어도 결과를 수긍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결과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단순히 게임에 참여해서 주사위를 던질 수 있게 해주는 ‘명목상의 기회’ 이상으로, 최소한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제공돼야 한다. 누구는 유학 경험에 빠방한 지원을 받다가 취업 시장에 나가고, 누군 알바 경험에 집안 살림까지 돌보다가 취업 시장에 나간다면? 과연 똑같은 조건에서 주사위를 던졌다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이 세계에 어린이 게임만큼의 정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 할 거리 + + + + + 보드게임, 부루마불 세계여행, 씨앗사 뭐니뭐니 해도 역시 실제 둘러앉아 주사위를 굴려가며 놀아야 재미있는 법이다. 이번 M.T.나 추석 명절에는 부루마블로 세계여행도 하고 세계에 대한 생각도 키워보는 건 어떨까.
+ + + + + 책,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로버트 노직 저, 남경희 역 보수적인 세계관에 바탕해 유토피아적인 자유주의 사상을 설파하는 이 시대의 고전이다. 노직의 주장은 ‘자유지상주의’로 분류되며 평등이나 분배 등을 주장하는 학자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단순히 ‘신자유주의’ 철학자라고 평가내리기전에 직접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