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즘 여섯시에 일어나 여섯시 반 천안행 1호선 열차를 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 외곽에서 중심부로 일을 하러 가는 시간에 그 열차에 탄 사람들은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다.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모두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열차의 리듬에 맞춰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일하는 곳의 청소 아주머니를 만났다. 연세도 많으신데 그 이른 아침에 먼 곳까지 힘들게 청소를 다니시기에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물으며 시작된 대화는, ‘이것도 할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는 할머니의 한숨 섞인 대답으로 끝났다.
아무도 아닌 사람들 지난 1월 2일 홍익대학교 측의 해고통보 이후, 홍익대학교 미화·시설·보안노동자의 농성이 2월 20일, 49일만에 종료되었다. 49일만의 타결은 ‘마침내 승리’라고 박수쳐야 할 일이겠지만, 지금 어디선가 같은 일이 되풀이 되고 있고, 본질적으로 달라 진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 진다. 노조가 농성에 돌입하면서 요구한 것은 최저임금 보장, 폭언 금지, 식비 지급, 식사공간 확보, 휴가 등이었고, 한겨울 49일 동안의 처절한 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최소한의 것,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합의서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하는 조건으로 미화직은 시급 4450원(기본급 93만50원), 보안직은 시급 3560원(기본급 116만3410원)을 각각 받도록 임금이 인상됐다. (2011년 현재 최저임금은 4320원이다.) 홍익대학교 농성을 계기로 우리 주변에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다. 한 언론매체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계단 밑에 사는 유령’, 청소 아주머니만 전국적으로 41만명에 달한다. 미화·시설·보안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얼마나 될 것이며, 우리가 하루동안 마주치는 ‘유령’만 해도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우리의 일상적 삶은 ‘유령’들 없이는 제대로 유지되지도 못할텐데 말이다. 2009년 평균임금이 79만6천원이었던데 반해, 여성 비율이 82%, 평균 연령 57세인 미화노동자가 한달 동안 일하고 받는 돈은 평균 74만원에 불과하다. 지금도 힘겨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감사는커녕, 최저 임금 이하의 돈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 가끔은 개념이 장착되지 않은 ‘인간 같지 않은 것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이것도 할려는 사람이 줄을 선’판에 짤릴까 두려워 마땅한 요구도 차마 못하던 사람들이다. 다행(?)히도 홍익대학교 사태로 이제 그네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주목을 받으면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일부는 감사할 줄 몰랐던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또 일부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런데 부당하고 부정의한 것에 대한 불타는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할지를 몰랐다. 영화에서처럼, 월급을 안주는 악덕 사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등골을 빼어먹는 사채업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립대 총장, 학생회장, 관리소장, 용역업체 사장 등 악당을 찾으려는 눈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어디에도 악의 축은 없었다. 글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은 2MB나 신자유주의 탓을 한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하던 것과 달라진게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인간적으로’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는 있겠지만, 이번 사태와 관련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극악무도한 악한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번 사태에서 진짜 악당은 어떤 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관료화된 세계 그 자체다. 본래 관료제는 많은 장점을 갖는다. 관료제 내에서 모든 행동은 규칙·목적·수단·‘객관적’ 비인격성 등 ‘합리성’에 제약을 받게 되며,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인 억압과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지배의 사회학』에서 설명했듯이, 관료제의 이상은 “‘분노나 흥분이 없이’, 또한 개인적인 동기나 감정적 영향의 작용을 받지 않고, 자의나 기분을 배제하며, 특히 형식적으로 엄격한 합리적 규칙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관료제로인해 노동자를 종 부리듯 하는 악독한 사장 대신에, 합리적인 규칙과 목적에 따른 ‘계약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악독한 사장의 자리에 ‘악독한 계약관계’가 자리 잡았고, 이에 따라 악당으로 지목할 수 있는 인격적 주체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농성자들과의 면담 첫날, 홍익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첫마디는 ‘학교가 잘못하는 거예요, 회사가 잘못하는 거예요?’였다고 한다. 용역업체가 잘못한거냐고 묻는다면, 용역업체는 ‘농성의 계기가 되었던 집단 해고사태 역시 대학교와 용역업체 간의 계약 종료가 그 이유였고, 계약이 종료된 상황에서 기존의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밖에 없다. 동종 업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회사가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편, 대학교 측 역시,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하기 때문에‘용역회사에서 노무관리를 도급해서 아웃소싱하는 것은 비용 절감과 조직의 효율을 위해 불가피하며 윤리적으로도 비난받을 일이 전혀 아니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대학교도 용역업체도 인격적 주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용역업체와 계약한 대학교 관계자도, 노동자들과 계약한 용역업체 관계자가 악한일리도 없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직장 밖에서는 좋은 자식, 부모, 친구인 사람들이 직장 내에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누군가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대학교나 용역업체에 근무하는 한 개인이 ‘노무 관리 아웃소싱’의 부당함에 반발하며 업무를 처리하지 않는다거나 직장을 그만둘 수 있을까? 아니, 그 서류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상황이 바뀔까? 대개의 경우, 내적 갈등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도 먹고 살아야지’라는 생각에 한 순간 밀려나게 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관료적으로 조직화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해왔고, 덕분에 관료제에 대한 반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관료적 행태는 유대인들을 매우 합리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기 위해 가스실을 개발·운용한 칼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처럼 극단적인 경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지금의 세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비인간적인 행태들은 어딘가 심드렁하고 소심한 관료주의의 결과이다. 미화·시설·보안노동자들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도 아닌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역시 누구의 잘못도 아닌 문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관료화되어가는 세상을 구해보려는 많은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개인적 노력과 자각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관료적 질서 내의 개인에게 이것은 너무 가혹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은 반성과 노력이 작은 변화를 가져온 것 또한 사실이다. 부당함과 부정의에 대한 분노가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할 때, 작은 변화도 가능할 것이다.
더 읽을거리
+ 책. ‘더블’ 박민규. 박민규의 단편소설집이다. 첫 번째 소설인 「근처」에서 암에 걸린 주인공이 삶의 대부분이라 믿었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부장이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건낸다. “저기…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말일세… 일주일 정도라도… 어떻게 인수인계를…”
+ 인터뷰. ‘민형배 광주 광산구청장의 ‘색깔 다른 행정’’ 오마이뉴스 11년 2월 7자. 인터뷰 중 민형배 구청장의 다음과 같은 말로 내용을 대신한다. “체화된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80년대 초반 위장취업 노동자로 일할 때부터 가진 노동에 대한,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우리 구청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시는 분은 청소하는 분인데 새벽 4시30분에 출근하신다. 이분들 비롯해서 우리 구청의 비정규직 일을 하시는 분들 직급별, 직능별로 임금표 봤더니 최저임금 간신히 넘더라. 너무하지 않나. 노동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