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세상이다. 뉴스를 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흉악범죄가 등장한다. 범죄와의 전쟁을 그렇게 하는데 왜 범죄가 감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생소할까?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흉흉해지기 시작한지 어언 수 십년. 그런 추세로 한참의 세월이 흘렀으니 우리는 지금 고담시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베트맨이 없는 고담시. 베트맨은 없지만,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흉악범의 신상공개가 허용되면서 악당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되었다. 그 이름들을 저주하고, 강력한 처벌을 기원하고, 일벌백계의 특별법을 제정하여 잡고 가두고 죽이고 거세한다. 그렇다고 세상이 덜 무서워진건 아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나, 당신, 우리 가족, 친구, 이웃 누구나가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 익명성이 문득문득 무서운 세상에 대한 공포를 펌프질 한다.
우리는 공포의 문화 속에 살고있다 무서운 건 흉악범죄 뿐만이 아니다.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고, 고급 아파트가 불에 탄다. 의학이 그렇게 발달해도 새로운 질병들은 계속 등장하고, 내가 먹는 음식 하나에 죽음의 가능성이 오르내린다. 음주운전에서 집단자살에 이르기까지 사건사고는 끝이 없다.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보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할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불안에 떨지 않고 살려면 티비를 보지 말아야한다. 그런데 티비를 보지 않으면 내가모르는 어떤 무서운일이 벌어졌나 불안하다. 예전에 입소문을 타고 퍼지던 무서운 이야기가 이제는 미디어를 통해 퍼진다. 우리가 살면서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하루 동안 티비 안에서 다 펼쳐진다. 미디어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대체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보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이야기에 더 큰 자극을 느끼고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 반응 때문에 종종 착시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한국의 경우, 1993년과 2002년 공식 범죄건수는 각각 130만 4천건과 183만 3천건이었다. 당연히 미디어에서는 난리가 났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곳은 베트맨없는 고담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1993년도의 범죄 신고율이 17.3%, 2002년도의 경우 34.9%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과는 달라진다. 신고율이 2배이상 늘었는데, 범죄건수는 1/2도 늘지 않았다. 오히려 범죄가 감소한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의 악의적인 조작에 따른 결과라는 음모론은 제쳐두자. 문제는 실제로 다수의 통계자료들이 감소치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이 더 무서워졌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100년전, 50년전, 10년전에 비해 감시와 처벌이 심해진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한다고 불안해한다. CCTV의 숫자가 늘어가는 만큼 오히려 공포도 같이 늘어간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롬바인’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공포의 문화’라는 책에서, 배리 글래스너 교수는 우리가 실제로 우려하는 만큼 흉악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으며, 대부분의 공포가 부풀려져서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모든 면에서 예전보다 안전하다는 수 많은 증거들을 제시한다. 거시적 차원에서 범죄율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의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질병들 또한 점차 늘어나고 있다. 기근과 가난, 질병과 범죄 등 모든 요소가 개선되어 수명도 증가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전보다 더 큰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자연상태에 살고 있다 공포의 문화에서는 사실보다 믿음이 큰 힘을 발휘한다. 실제로 범죄율이 얼마인지 따위는 상관없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고 언제든지 내가 희생이 될 수 있다는 불안함,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믿음이 공포의 문화의 원동력이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꼭 이런 상황이다. 투쟁은 그러한 투쟁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상황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홉스는 폭력의 독점자인 국가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상태에서 이 같은 투쟁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개인이 자의적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실제로 그들이 폭력을 휘두르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 떨게된다. 상대방의 자의적 폭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내가 선수를 치는 수 밖에 없다. 상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상태에서는 모두가 서부극의 총잡이들처럼 살아가야한다. 하나, 둘, 셋 하기 전에 상대방이 쏘면 어떡하지? 그리고 BANG! 그래서 홉스는 모든 개인이 폭력을 위임하여, 국가가 폭력의 독점자로서 군림하게되면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리있는 말이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한다면, 국가 권력에 대한 공포는 있어도, 자연상태에서와 같은 만인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공포가 없는 세상. 그런데 레오 스트라우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공포가 없다면 왜 개인들이 계속해서 국가에 권력을 위임하겠는가? 아, 계약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포가 있어야 한다.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필요없다. 그래서 적당한 공포의 문화는 국가에게도 필요한 것이 된다. 특히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공포는 국가 권력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미디어는 공포를 이슈화해 돈을 벌고, 폭력의 독점자는 공포에 폭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와중에 보안, 보험 뭐 그런 회사들은 공포로 장사를 한다. 점점 살벌해지고 믿을 놈 하나없는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공포의 문화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그 문화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모든 곳에 공권력의 힘이 미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상태와 같은 신뢰의 부재와 공포를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공포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이 문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흉악범들을 잡고 가두고 죽이고 거세하면서 집단적으로 공포 정복했다는 광기어린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동학대, 범죄, 약물남용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 근본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소득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왜 그러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돌아오기전에, 범죄자를 우리의 속죄양으로 삼는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진들 공포는 만연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이 사는 곳이 고담시라면, 당신 역시 고담 시민이다.
더 읽을거리
+ 책. ‘공포의 문화: 왜 우리는 근거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가?’ 배리 글래스너. 책 제목에서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도덕적 불안을 자극하고, 그에 대한 상징적 대용물을 제공함으로써 막대한 부와 권력을 차지한 ‘그들’에 대한 폭로전이다.
+ 책. ‘우리가 꼭 알아야할, 그러나 잘 알지 못해TEjs 세상의 몇 가지 사실들’ 제시카 윌리엄스. 우리가 진짜 무서워야할 것을 말해주는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그로테스크한 불평들이야말로 섬뜩하고 무서운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