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이 종말이란다. 핵전쟁/온난화/기상이변/행성X와 충돌 등 이유야 뭐가됐든 간에, 아무튼 내 후년이면 종말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2012년에 지구/인류가 종말할거라는 종말론자들의 주장에는 ‘진짜 모든 것이 끝나는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럴싸한 것들도 있다. 이제는 대재앙과 종말을 이야기하는 영화도 식상할 지경이다.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 진짜 끝이라는데, 다들 준비는 잘 하고 있나 모르겠다.

종말이 두렵다고? 종말론(Eschatology)은 “최후(last)”라는 뜻의 그리스어 Eschatos에, -logy가 결합된 용어로, 세계 및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이나 자연의 마지막을 다루는 ‘학문’이다. 종말론은 흔히 심판/메시아/예언과 같은 종교적 개념들과 연결되는데, 이는 종말론의 시작이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는 기원전 500년즈음부터 종말론이 제기되었는데, 그 내용인 즉, 종말이 도래하면 선한 신과 악한 신이 투쟁이 선한 신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가난/고령/질병/갈증/기아/죽음이 끝난 완전한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종말은 모든 것이 끝나는 사건임과 동시에, 새로운 현실/삶/사상/존재의 방식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때문에 종말은 ‘세상의 끝’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끝’ 또는 ‘새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종말론을 가지고 있는 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이다. ‘또 다른 시작’은 대부분 일종의 유토피아적 세계로 귀결된다 (고대 마야의 종말론은 한 시대가 끝나고 그와 비슷한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물론, 종말의 대재앙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 즉 유토피아에서 살 수 있는 티켓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티켓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즉 ‘믿지 않는 자’는 말 그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종교적 종말론은 (믿는 자들의) 유토피아와 (믿지 않는 자들의) 디스토피아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종교적 종말론이 신의 최종 완성 목표지점(유토피아)에 단선적으로 향해가는 운명론적/목적지향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믿는자들은 이 종말을 소망하면서 살 수 있다. ‘세상이 이따위로 굴러가는걸 보니 멸망이 멀지 않았다’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종말에 대비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종말이 두렵다고! 고대에는 신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종말과 구원의 조건이 있었다. 구원의 조건이 ‘믿음’으로 단일화된 것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등장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신, 하나의 유토피아(구원/천국), 하나의 디스토피아(종말/지옥)가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탈 주술화 과정’이라고 부르든 ‘세계의 탈신화’라고 부르든 간에, 근대적 계몽을 통해 ‘비합리적 믿음’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신은 죽었고, 운명론적/목적지향론적 종말론도 힘을 잃게 된 것이다. 이제 종말은 신의 분노/계획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에 바탕한 것으로 이해된다. 수마트라 토바호에 있는 지구 최대 화산이 2012년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든가, 미래 예측 시스템 ‘웹봇’이 2012년 지구 온난화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예측했다든가 하는 것과 같은‘과학적 종말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과학적 종말론’은 예언가들의 예언에 과학적 견해를 덧붙이는 수준이며, 어떤 과학적 근거도 종교적 종말론과 같은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탈 주술화/세계의 탈신화의 원동력인 합리성과 합리적 과학이 종말에 어떤 의미/목적을 부여해주지 못한다. 2012년 종말론을 믿는다면, 의미없는 종말/죽음이 눈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영화 ‘2012’에서, 미처 대비할 수 없을 수준의 급작스러운 종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게된 소수의 정치가들은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스스로를 구원하려하고, 자본가들은 돈으로 다음세계의 티켓을 산다. 영화 속에서 구원은 절대적 믿음이 아니라, 합리적인 계획과 자본으로 쟁취하는 것이 된다. ‘구원 받을만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 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2012’는 ‘지구를 종말에서 구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 있는자들만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가장 섬뜩한 종말영화이다. 그래서인지 집단 자살 소동을 벌이는 종교적 종말론자들과 달리, 과학적 종말론자들은 살아남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대재앙을 피해 백두대간에 은신처를 마련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종말을 기다리기보다 이에 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삶을 미래의 종말을 대비하는데 소모한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종교적 종말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종말 뒤에 유토피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종말 뒤의 디스토피아에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영화 ‘2012’가 주는 교훈은 살아남으려면 돈이나 권력을 갖거나, 살려는 강한 의지와 행동력을 가져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뻔한 헐리우드식 결론이긴 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종말/죽음이 다가왔을 때, 누군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는다. 종말 자체는 죽음 외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계기가 된다. 의미 없는 종말에 절망하거나, 그 뒤를 바라보며 현재를 희생할 것이 아니라,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종말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사과나무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 심어야 한다.

더 읽고 볼거리

+ 책. ‘종말의 바보’ 이사카 코타로. 종말을 맞이하는 여러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이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하는 시오즈카 마코토의 만화도 있다.

+ 애니메이션. “개그만화 보기좋은날, ‘종말편’” 마스다 코우스케. 가슴아프게 웃긴 애니메이션. 종말의 진짜 패닉은 종말이 피해간 이후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