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개봉한지 몇 년이나 지나버린 영화 ‘매트릭스’ (Matrix)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계가 꿈이고, 바깥에 진짜 비참한 진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던져서 상당한 이슈를 일으켰다. 영화 속에서 빨간약을 선택하면 기계장치에 연결되어 생체 배터리로 살아가는 비참한 진짜 세계로 나가게 되고, 파란약을 선택하면 그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세계에 머물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동 굴 우화’ 같은 이야기로, 빨간약은 동굴 밖의 진리와 진실을, 파란약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를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우리 모두 빨간약 먹고 깨달아요!’로 시작해, ‘나쁜 매트릭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이얍이얍!’ 여차여차해서 ‘진짜 좋은 진짜 세계를 만들어서 천년만년 잘 살았습니다’로 끝날 것 같지만, 사실 그것보단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아주 달콤한 파란약 ‘우리모두 힘을 합쳐 매트릭스를 물리쳐요!’와 다르게, 매트릭스에서는 한번 빨간약을 먹은 사람이 다시 파란약을 먹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한번 진실에 눈뜬 사람이 ‘자의적으로’ 눈을 감으려 한다는 것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 ‘루 저’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엄청나게 쓰고 괴로운 빨간약 대신 달콤한 파란약을 택한 건 어쩌면 대단히 인간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파란약을 먹고 머무르게 되는 세계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동일한 것으로, 우리가 흔히 가상세계를 떠올릴 때 생각하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는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세계가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파란약의 세계(즉, 우리가 사는 세상)는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서 괴로울 수도 있는 그런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이 비참한 빨간약의 세계보다 가짜인 파란약의 세계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다면, 가짜세상에 머무르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짓의 세계인 동굴(혹은 매트릭스) 안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사람을 루저라고 비난할 수 있는 건, 빨간약을 먹고 보게된 비참한 세계가 진짜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진짜 같은 가짜, 즉 매트릭스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무엇이 진짜이고, 또 무엇이 가짜인지를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빨간약을 먹고 보게 된 세상이 가짜 혹은 일종의 환각상태이고 파란약이 진짜일 수도 있고, 빨간약과 파란약 모두가 가짜일 수도 있다. 매트릭스 이야기의 진짜 섬뜩한 부분이 바로 어느 쪽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가상이다 우리의 뇌는 평소에도 복잡한 자극에 반응하여, 다양한 시뮬레이션 과정을 수행한다. 특히 꿈은 우리가 ‘진 짜 같은 시뮬레이션’을 경험하는 가장 익숙한 방법이다. 꿈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만난적 없는 사람과 실제로 가본적 없는 장소에서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과 장소와 일이 얼마나 현실과 같이 자세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 어설프고, 무언가 완전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그 사람과 그 장소에서 그 사건을 겪었다고 느낀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리퍼드 피코버(Clifford Pickover)는 “멀티 라이프: 우리는 모두 가상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 시뮬레이션을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100퍼센트 완전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오늘 내가 꾸고 싶은 꿈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흔히 ‘가상 현실’이라고 말하는 과학적 장치가 더 발전하여 3차원의 공간성, 실시간의 상호작용성, 자기 투사성의 세 가지 요소를 더욱 더 진짜처럼 보여준다면 어떨까? 보다 큰 ‘몰입감’을 제공하는 가상현실이 우리를 현실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면? 그리고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상현실 속에서 모두 할 수 있다면? 영화 ‘아 바타’ (Avatar) 속 주인공처럼 또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실질적 신체적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이, 또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면? 이 모든 이야기가 꿈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이러한 꿈을 꿀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어떤 TV 광고는 ‘인 간이 더 자유로워야 하기에TV가 더 사실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강의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이 좋은 월드의 사이 좋은 친구를 만난다. 그 친구를 만나 놀 때도 가상 세계에서 논다. 세계 속을 걷기에는 여러모로 힘들어서 대신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가는 이야기를 본다. 역시나 우리가 TV에서 본 것처럼, 이미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현실세계를 떠나 좀 더 달콤한 가상현실을 선택한 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현실세계를 등지고 가상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진짜 같은 시뮬레이션으로 세컨드 라이프가 아니라 수 많은 멀티 라이프가 가능하다면, 당신이 달콤한 파란약을 택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보고 읽을 것
+ 책 ‘얼터너티브 드림: 한국 SF 대표 작가 단편 10선’ 복거일 외 책의 제목이기도 한 김덕성의 ‘얼터너티브 드림’을 비롯하여, 듀나, 오경문, 이영도 등의 재치있는 SF 단편들이 실려있다.
+ 책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 예 지젝 외 슬라보 예 지젝을 비롯한 17명의 현직 철학 교수들이 영화 <매트릭스>의 철학적 의미에 관해 쓴 15편의 원고를 묶은 것이다. 이 외에 글렌예페스가 엮어낸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있나’와 국내 철학자들이 쓴 ‘철 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등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