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는다는 것이,

기억한다는 것이,

곧 가혹한 가뭄같은 세상에서도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내는 방법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1.

코끼리를 보았다. 신혼여행으로 치앙마이 동물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동물원 이곳저곳을누비던 투어 버스가 작은 원두막 앞에 섰다. 앳된 남자아이가 좌판에 봉투를 몇 개 늘어놓았다. 과일 한 줌이 들어 있는 작은 봉투였다. 곧이어 다른 사육사가 코끼리 세 마리를몰고 왔다. 코끼리들은 커다란 귀를 나른하게펄럭이며 투어 버스 쪽으로 다가왔다. 느릿느릿 여유가 느껴지는 걸음걸이였지만 어딘가다급한 기색도 엿보였다. 코끼리가 한 걸음씩다가올수록 이질감도 덩달아 커졌다. 위협적인 상아 사이로 긴 코가 불쑥 뻗어 나오는 장면은 정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관광객들은 과일에 정신 팔린 코끼리를 쓰다듬고 사진을 찍어댔다. “코끼리들에겐 이게주식입니다. 관광객들이 주는 과일을 잘 받아먹게 하려고, 이것 외에는 먹이를 주지 않는곳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딘가에서 주워들은이야기가 떠올라 식은땀이 났다. 우연히 마주친 코끼리의 커다란 눈망울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떨군 곳에 코끼리 다리가있었다. 힘차고 커다란 다리에 어울리지 않게조악한 족쇄가 무겁게 달라붙어 있었다.

찰나의 탐닉이 끝나자 사육사는 코끼리들을재촉했다. 코끼리들은 이내 무거운 발걸음을옮겼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할 겨를도없이 투어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차창 뒤로 멀어지는 코끼리를 눈으로 좇았다.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등허리의 자잘한 상처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사육사는 길고 날카로운 호미 같은 것을 연신 휘둘러댔다. 코끼리와 버스가 만들어낸 흙먼지 사이로,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2.

코끼리를 보았다. 어느 한적한 주말, TV 채널을 돌리다 발견한 다큐멘터리에서였다.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의 남자가 초원의 코끼리를관찰하고 있었다. “무리 지어 생활하는 코끼리들에게 기억력은 생존에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나레이터의 목소리와 함께, 작열하는태양과 갈라진 땅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극심한 가뭄과 같은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코끼리 무리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하는 것은 나이 든 암컷이라고 한다. 나이 든암컷은 오랜 경험과 특유의 기억력으로 먹이와 물이 있는 곳을 떠올리며 무리를 이끈다. 그 기억은 엄마 코끼리에게서 새끼 코끼리에게로, 다시 그 새끼에게로 이어진다.

나이 든 암컷의 죽음은 곧 기억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새끼 코끼리들의생존을 위협한다. “큰 상아를 노리고 나이 든암컷들을 겨냥한 밀렵 행위가 극심해지면서, 결과적으로 새끼 코끼리의 사망률이 급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커다랗고 위협적인 상아는그들을 지켜주기는커녕 허망한 죽음의 이유가 되었다. 남자는 차분한 어조로 현실의 냉혹함을 설명했지만, 목소리에 슬픔과 분노가묻어나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엔 케냐의 코끼리 고아원이 나왔다. 운 좋게 살아남은 새끼 코끼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상아를 노린 밀렵꾼의 손에 엄마를 잃은 루디샤(가명), 병들어 죽은 엄마 곁에서 굶주린 상태로 발견된 아마니(가명)에게 운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잔인할지도 모른다. 기억력이 좋은 코끼리들은 엄마를 잃었던 잔혹한 순간을 영영 잊지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밤이면 아기 코끼리들의 울음소리가 고아원을 가득 메운다. 이해할수 있을 리 없는데도, 내 귀엔 엄마를 찾는 아기의 울음이, 엄마 잃은 날의 악몽에 울부짖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다음 날 아침, 분유를 한껏 마신 아기 코끼리들이 즐거운 듯 서로 장난치며 떠들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상아가 자랑스럽게 빛났다. 나도 모르게 아빠미소를 짓다가 이내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상아가 자라날수록 그삶의 어둠도 함께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쿵. 쿵. 쿵.” 커다란 코끼리가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았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3.

코끼리를 보았다. 콜드플레이(Coldplay)의 ‘파라다이스(Paradise)’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에서였다. 뮤직비디오는 영국의 한 동물원에 갇혀있던 코끼리가 파라다이스를 찾아 탈출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었다. 새끼 때부터 코끼리 다리에 족쇄를 묶어놓으면, 그 고통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성체가 되어서도 체념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들었는데, 이 코끼리는 그렇지 않았나보다.

하루하루 날짜를 새면서 쇼생크 탈출을 꿈꾸던 코끼리는 간수들의 눈을 피해 탈출한 뒤, 자신의 파라다이스를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자전거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비행기에 숨어들기도 하면서, 말 그대로 산도 넘고 물도건넌다. 가까스로 도착한 아프리카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보지만, 코끼리를 태워줄 리만무하다. 자전거 한 대를 얻기 위해 구걸도해보지만, 주머니를 탈탈 털어 겨우 외발자전거 하나를 마련할 수 있었을 뿐이다.

물론, 진짜 코끼리 이야기는 아니다. 콜드플레이의 보컬, 크리스 마틴(Chris Martin)이 코끼리 탈을 쓰고 코끼리인 척 연기를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위태위태하게 외발자전거로 도로를 달리던 코끼리가 아프리카의 초원에서친구 코끼리들(코끼리 탈을 쓴 콜드플레이 멤버들)을 만나 춤을 추며 “파라다이스”를 외치는 장면에선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가 느껴졌다. 뮤직비디오는 네 마리의 코끼리(정확히는 코끼리의 탈을 쓴 네 명의 멤버들)가 초원을 달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족쇄도, 선명한 상처도 없었다.

#4.

코끼리를 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한 해동안 겹겹이 쌓인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삶이라는 족쇄가 다리를 끌어당겨도, 날카로운권력이 생채기를 내도, 코끼리는 쓰러지지 않았다. 무심한 장벽이 길을 가로막고, 그를 쓰러트리고야 말겠다며 거센 물줄기가몰아쳐도, 코끼리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진도군 해상에, 팽목항에, 그리고 4월의 광화문에 코끼리가 있었다.

코끼리는 잊지 않는다. 그 기억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다시 그 자식에게로 이어진다. 잊지 않는다는 것이, 기억한다는 것이, 곧 가혹한 가뭄같은 세상에서도 우리의 아이들을지켜내는 방법임을 본능적으로 알고있었다. 그래서 잊히지 않는 슬픔으로, 잊지 않겠다는 울부짖음으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나아갔다. “쿵. 쿵. 쿵.”우직하게 걸었다.

투어 버스에 탄 관광객처럼, 나는 TV와 SNS 로 그 장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고개를 들 수없었고, 부끄러움에 욕지기가 나왔다. 그사이코끼리들이 서로 만났다. 무리를 이룬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족쇄도, 선명한 상처도 문제되지 않았다. 코끼리들이 함께한 그곳이 초원이었다. 그래, 시끄러운 댓글놀이 따윈 잊어버리자. 대신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것을, 기억해야 할 것을, 분명히 하자. 당신도, 나도, 코끼리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