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나를 피곤하게 할 때, 특히 치열한 경쟁에 지치고 힘들때, 나는 스포츠 만화를 본다. 스포츠의 핵심은 경쟁에 있고, 때문에 모든 스포츠 만화는 주인공이 경쟁을 통해 점차 성장하고 또 경쟁에서 이겨나가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결국엔 타고난 천재가 승리하거나 엄청난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 성장하는 이 뻔한 이야기의 어디가 재미있느냐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우리에게 대리만족 외에 어떤 해방감을 주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언제나 이노우에 타케히코의「슬램덩크」, 그 중에서도 송태섭을 이야기한다.
송태섭, 그는 누구인가? 일본 이름은 미야기 료타, 생일은 7월 31일, 북산고등학교 2학년 1반, 만 17세의 소년이다. 북산농구부 선수로,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PG), 주전 중 유일한 2학년이자 168cm의 최단신이기도 하다. 그는 사실 다른 주요인물들에 비해 별다른 스토리가 없는 이른바 소외된 캐릭터다. 농구부 매니저 한나를 일방적으로 좋아한다든가, 엇나가던시절의 정대만에게 불려가서 흠씬 두들겨 맞고 입원했다든가 하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사실 송태섭은 경쟁, 재능, 성장이 핵심인 스포츠 만화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다. 중학교 때부터 제법 실력있는 선수였다지만,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회가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다른 팀원들에 비해 점점 뒤처지는 느낌마저든다. 전국구 센터 채치수, 중학교 시절 MVP 불꽃남자 정대만, 역대 급 천재로 손꼽히는 서태웅, 무서운 포텐셜을 가진 강백호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모습은 조금 초라하기까지하다. 채치수나 강백호처럼 신체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고 정대만이나 서태웅처럼 천재적인 센스를 가진 것도 아닌 그가 그나마 내세울 거라고는 빠른 발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압도적으로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강자가 되고 승자가 되기 위해 그런 송태섭이 항상 자신보다 신체 조건이나 실력 면에서 훨씬 뛰어난 상대들과 경쟁해 왔다. 그러니 상대방을 제압하여 경기를 좌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관중 의 열화와 같은 환호도 별로 받지 못했다. 이런 경쟁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북산의 주전으로 팀의 전국대회 진출을일구어냈고, 마지막 시합에선 한나에게 ‘도내 넘버원 가드’라는 칭찬을 받으며 고교농구 최강인 산왕을 꺾는 데 일조하더니, 결국엔 채치수가 떠난 북산 농구부의 주장이 되었다. 아니, 대체 그 송태섭이 어떻게 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치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경쟁, 특히 생존경쟁을 이야기할 때 흔히 약육강식을 언급하는 건 사실 잘못된 것이다. 약육강식의 예로 즐겨 사용되는 먹이사슬은 순환적인 것으로,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생물이 사자를 먹는다는 것이 핵심이기도 하다. 게다가 다윈은 일찍이 생물들의 생존경쟁에서 가장 강한자가 아니라,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라고 주장 했다. 요약하자면 약육강식이 아니라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이다. 가장 강한 공룡이 멸종하고, 바퀴벌레가 살아남은 것도 그런 이유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어가면, 다윈의 주장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처럼 환경의 변화에 적응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체 중에 우연히 환경 변화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 살아남았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잎사귀가 높은 곳에있어서 이걸 먹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목이 점점 길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목이 길게 태어난 기린만 높은 곳의 잎사귀를먹을 수 있었기에 그 외에는 자연도태(自然淘汰)되고, 목 긴 기린의 후손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약육강식과 구별되는이 적자생존의 논리는 19세기 사회과학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인간 역시 생명체로서 자연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니 살아남은 자가 결국 가장 적합한 자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소위 소셜 다위니즘(Social Darwinism)이라는 걸 주장했다. 인간세계에서도 생존경쟁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잔인한 이론이었지만, 한편으론 어떻게 영웅이나 왕족같은 강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 권력을 쥘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기도 했다. 소셜다위니즘은 아시아에 전파되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대표적 사회진화론자인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진화의 핵심으로 우승열패(優勝劣敗)를 이야기했다. 경쟁에서 우등한 자가 이기고 열등한 자가 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며, 인간도 예외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흔히 약육강식과 같은 말로 이해되는 우승열패는 사실 적자생존에 더 가까운 말이다. 우승 열패가 우생학(優生學)을 연상시키는 용어이긴 하지만, 사실 당시에는 반드시 그런 의미만은 아니었다. 과연 누가 우등한 것이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일까? 카토는 다윈을 차용하여 유전적 요인에 따라 우열이 갈린다고 말하면서도, 라마르크를 차용하여 환경적 요인과 그에 대한 적응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우등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세에 적응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혹자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가장 잘 적응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라는 말에서 당시의 치열한제국주의 침탈 경쟁 속에 살아남을 희망을 찾기도 했다. 그 냉혹한 제국주의 시기에도 인간 세상의 경쟁의 본질은 약육강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경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사람들조차 그 치열한 자연계의 생존 투쟁,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의 경쟁이 결코 약육강식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흔히 경쟁을 약육강식에 비유한다. 소년 만화는 더하다. 다른 만화였다면, 송태섭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빠른 발을 무기삼아 점점 더 강자가 되어 경쟁자들을 압도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슬램덩크」의 송태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천재나 강자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패스 플레이로, 교체나 부상도 없이 북산의부족한 2%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오늘도 삶이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건, 재능 없는 내가저런 천재들과의 경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그래서 강자가 되고 승자가 되기 위해 무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슬램덩크」를 펼쳐 들고 송태섭의 플레이를 감상하는 건 어떨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히 해내면 충분하다는, 평범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늘도 삶이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건 재능 없는 내가 저런 천재들과의 경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지를 걱정하고 그래서 강자가 되고 승자가 되기 위해 무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